반가사유 / 류 근
다시 연애하게 되면 그땐
술집 여자하고나 눈 맞아야지
함석 간판 아래 쪼그려 앉아
빗물로 동그라미 그리는 여자와
어디로도 함부로 팔려 가지 않는 여자와
애인 생겨도 전화번호 바꾸지 않는 여자와
나이롱 커튼 같은 헝겊으로 원피스 차려입은 여자와
현실도 미래도 종말도 아무런 희망 아닌 여자와
외항선 타고 밀항한 남자 따위 기다리지 않는 여자와
가끔은 목욕 바구니 들고 조조영화 보러 가는 여자와
비 오는 날 가면 문 닫아 걸고
밤새 말없이 술 마셔주는 여자와
유행가라곤 심수봉밖에 모르는 여자와
취해도 울지 않는 여자와
왜냐고 묻지 않는 여자와
아,
다시 연애하게 되면 그땐
저문 술집 여자하고나 눈 맞아야지
사랑 같은 거 믿지 않는 여자와
그러나 꽃이 피면 꽃 피었다고
낮술 마시는 여자와
독하게 눈 맞아서
저물도록 몸 버려야지
돌아오지 말아야지
반가사유 2 / 류 근
아주 쓸쓸한 여자와 만나서
뒷골목에 내리는 눈을 바라봐야지
옛 영화의 제목과 먼 나라와 그때 빛나던 입술과
작은 떨림으로 길 잃던 밤들을
기억해야지
김 서린 창을 조금만 닦고
쓸쓸한 여자의 이름을 한 번 그려줘야지
저물지 않는 추위를 견디기 위해
가난을 저주하는 일 따윈 하지 않으리
아주 쓸쓸한 여자의 술잔에 눈송이를 띄워주고
푸른 손등을 바라보리
여자는 조금 야위고
나는 조금씩 흩어져야지
흰벽에 아직 남은 체온을 기대며 뒷골목을 바라봐야지
내리는 눈과 지워진 길들과
돌이킬 수 없는 날들의 검은 발자국
아주 쓸쓸한 여자와 만나서
조금은 쓸쓸한 인생을 고백해야지
아무것도 아니고 누구의 것도 아닌
그러나 그 모든 것이어서 슬펐던 날들을
기억해야지
쓸쓸함 아니고선 아무 것도 가릴 것 없는
아주 쓸쓸한 여자의 눈빛을
한 번 오래도록 바라봐야지
뒷골목 몹시 서성거린 내 눈빛
누군가 쓸쓸히 바라봐야지
* 半跏思惟(반가사유) 책상다리를하고 깊게 생각한다는 뜻.
半跏 : 半跏趺坐(반가부좌)의 준말
상처적 체질 / 류 근
나는 빈 들녘에 피어오르는 저녁연기
갈 길 가로막는 노을 따위에
흔히 다친다
내가 기억하는 노래
나를 불러 세우던 몇 번의 가을
내가 쓰러져 새벽까지 울던
한 세월 가파른 사랑 때문에 거듭 다치고
나를 버리고 간 강물들과
자라서는 한번 빠져 다시는 떠오르지 않던
서편 바다의 별빛들 때문에 깊이 다친다
상처는 내가 바라보는 세월
안팎에서 수많은 봄날을 이룩하지만 봄날,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꽃들이 세상에 왔다 가듯
내게도 부를 수 없는 상처의
이름은 늘 있다
저물고 저무는 하늘 근처에
보람 없이 왔다 가는 저녁놀처럼
내가 간직한 상처의 열망, 상처의 거듭된
폐허,
그런 것들에 내 일찍이
이름을 붙여주진 못하였다
그러나 나는 또 이름 없이
다친다
상처는 나의 체질
어떤 달콤한 절망으로도
나를 아주 쓰러뜨리지는 못하였으므로
내 저무는 상처의 꽃밭 위에 거듭 내리는
오, 저 찬란한 채찍
독백 / 류 근
차마 어쩌지 못하고 눈발을 쏟아내는 저녁 하늘처럼
내게도 사랑은 그렇게 찾아오는 것이다
밀린 월급을 품고 귀가하는 가장처럼
가난한 옆구리에 낀 군고구마 봉지처럼
조금은 가볍고 따스해진 걸음으로 찾아오는 것이다
오래 기다린 사람일수록 이 지상에서
그를 알아보는 일이 어렵지 않기를 기도하며
내가 잠든 새 그가 다녀가는 일이 없기를 기도하며
등불 아래 착한 편지 한 장 놓아두는 것이다
그러면 사랑은 내 기도에 날개를 씻고
큰 강과 저문 숲 건너 고요히 내 어깨에 내리는 것이다
모든 지나간 사랑은 내 생애에
진신로 나를 찾아온 사랑 아니었다고 말해주는 것이다
새처럼 반짝이며 물고기처럼 명랑한 음성으로
오로지 내 오랜 슬픔을 위해서만 속삭여주는 것이다
나는 비로소 깨끗한 울음 한 잎으로 피어나
그의 무릎에 고단했던 그리움과 상처들을 내려놓고
임종처럼 가벼워진 안식과 몸을 바꾸는 것이다
차마 어쩌지 못하고 눈발을 쏟아내는 저녁 하늘처럼
젖은 눈썹 하나로 가릴 수 없는 작별처럼
내게도 사랑은 그렇게 찾아오는 것이다 새벽별
숫눈길 위에 새겨진 종소리처럼
「문학과지성」 제375권 『상처적 체질』
시인의 말
진정한 지옥은 내가 이 별에 왔는데
약속한 사람이 끝내 오지 않는 것이다.
사랑한다고,
그립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2010년 4월 감성마을 慕月堂에서 -
epilogue
문을 열고 들어가면 아직 아픈 사람이 있어 내 청단풍잎 같은 손바닥으로 그의 이마를 짚어줄 수 있으면 좋으리.
문득 겨울을 맞은 나무처럼 삶의 지붕이 쓰라린 사람일 때엔 낮은 데서 빛나는 종소리 한 줌의 무게로 다가가 그의 가슴을 쓰다듬을 수 있으면 좋으리.
조금은 가난하고 조금은 깊어진 음성으로 먼 눈나라의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으면 좋으리. 손금이 마주치는 순간의 평화와 안식을 얹어줄 수 있으면 좋으리.
그러나 아아, 그 아프고 쓰라린 사람이 영원히 나여서 단 하루라도 돌아가 그의 손 아래 내 이마와 어깨 눕힐 수 있으면 좋으리.
멀고 깊은 눈나라에 고요히 갇힐 수 있으면 좋으리.
장석주의 詩와 詩人을 찾아서 (41) 류근 〈반가사유〉
끝난 사랑을 위한 찬가
다시 연애하게 되면 그땐
술집 여자하고나 눈 맞아야지
함석 간판 아래 쪼그려 앉아
빗물로 동그라미 그리는 여자와
어디로도 함부로 팔려 가지 않는 여자와
애인 생겨도 전화번호 바꾸지 않는 여자와
나이롱 커튼 같은 헝겊으로 원피스 차려입은 여자와
현실도 미래도 종말도 아무런 희망 아닌 여자와
외항선 타고 밀항한 남자 따위 기다리지 않는 여자와
가끔은 목욕 바구니 들고 조조영화 보러 가는 여자와
비 오는 날 가면 문 닫아 걸고
밤새 말없이 술 마셔주는 여자와
유행가라곤 심수봉밖에 모르는 여자와
취해도 울지 않는 여자와
왜냐고 묻지 않는 여자와
아,
다시 연애하게 되면 그땐
저문 술집 여자하고나 눈 맞아야지
사랑 같은 거 믿지 않는 여자와
그러나 꽃이 피면 꽃 피었다고
낮술 마시는 여자와
독하게 눈 맞아서
저물도록 몸 버려야지
돌아오지 말아야지
<반가사유>를 읽는 일이 씁쓸하고 아릿했던 것은 끝난 사랑의 후일담에 따르기 마련인 씁쓸한 긴 여운 때문이고, 그것의 성분적 요소들이 지독한 결핍과 쓰라린 실패이기 때문이다.
“다시 연애하게 되면 그땐/술집 여자하고나 눈 맞아야지”라는 구절에서 ‘다시’라는 부사를 주목한다. ‘다시’는 그 어휘의 문법적 쓰임인 계기적 시간을 잇는 운동성보다는 그것의 소진에 따른 단절을 더 많이 지시한다.
시의 화자는 ‘다시’ 앞에서 더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 채 주저앉아 있다. ‘다시’는 계기적 시간으로 나아가려는 화자의 안쓰러운 몸짓을 가리키지만, 실천적 행동으로서의 그것을 견인하지는 못한다. 이 시에서 ‘다시’라는 부사는 존재의 이행과 변화라는 애초의 제 뜻을 감당하는 일은 버겁다. 하지만 ‘다시’는 제 뜻을 감당하지 못함으로 그 의미화에 닿는다. ‘다시’는 존재의 이행보다는 앞의 연애가 끝나버렸다는 것, 그 연애는 회고라는 형식에서만 유효함을 보여준다.
그 뒤를 잇는 여러 시구는 다시 사랑할 여자의 조건에 대해서 늘어놓는다. 애인 생겨도 전화번호 바꾸지 않는 여자, 외항선 타고 밀항한 남자 따위 기다리지 않는 여자, 가끔은 목욕 바구니들고 조조영화 보러 가는 여자, 유행가라곤 심수봉밖에 모르는 여자… 따위가 바로 그것이다.
범박한 세속성과 청승스러움을 나타내는 이 조건들은 앞서 떠난 여자가 갖지 못한 것이리라. 만일 앞선 연애의 여자가 그 조건들을 충족시켰다면 그 연애는 끝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류근의 상상세계에서 여자는 사랑 앞에서 앞뒤를 재고 늘 멈칫거리거나 망설인다. 왜일까? 사랑을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사랑 앞에서 간절함으로 목을 매고 그래서 그 사랑은 뜨겁고 아프다.
여자는 그 사랑이 너무 아프다고, 아픈 것은 사랑이 아니라고 떠난다. 그런 여자 앞에서 시인은 다음과 같이 말할 뿐이다.
“여자여, 너무 아픈 사랑도 세상에는 없고/
사랑이 아닌 사랑도 세상에는 없는 것/
다만 사랑만이 제 힘으로 사랑을 살아내는 것이어서/
사랑에 어찌 앞뒤로 집을 지을 세간이 있겠느냐”
(〈너무 아픈 사랑〉)
사랑은 제 힘으로 사랑을 살아내는 것이지만, 사랑이 지속되려면 거꾸로 사랑 아닌 그 무엇의 떠받드는 것이 필요하다. 사랑은 절대로 저 혼자서 그것을 지속시킬 동력을 만들지 못하는 까닭이다. 사랑만으로 사랑하는 것은 그 사랑이 곧 끝나리라는 예고일 따름이다.
그래서 “슬퍼 말아요, 어차피 우리들의 연애는/불친절한 예언이었을 뿐이니까요.”(〈친절한 연애〉)라는 시구는 불친절한 예언이 곧 사랑의 실천적 양태임을 말한다. 사랑만으로 사랑을 살아내겠다는 연인들의 약속은 찬란한 순수성으로 반짝거리지만 그 뒤에 숨은 함의는 사랑을 끝내겠다는 불친절한 예언이다.
방금 사랑에 빠진 모든 연인은 한결같이 사랑은 시작과 함께 끝을 향해 달려간다는 실체적 진실에 눈감는다.
“사랑 같은 거 믿지 않는 여자와/그러나 꽃이 피면 꽃 피었다고/낮술 마시는 여자와/독하게 눈맞아서/저물도록 몸 버려야지/돌아오지 말아야지”라는 시구에는 새로운 사랑에 대한 희구가 아니라 이미 끝난 사랑에 대한 회한이 더 짙게 배어난다. 이 시구들은 메아리가 없는 혼잣말이다.
화답이 없는 독백은 ‘내’가 떠나간 사랑과 다시 올 사랑 사이에 혼자 있음의 증거다. 저물도록 몸 버려야지, 혹은 돌아오지 말아야지, 따위의 가정법은 역설적으로 아직 사랑이 회임되지 않았음을, 새로운 사랑이 찾아올 기대 가능성의 희박함을 드러낸다. 결국 ‘나’는 버림받고 홀로 남아 ‘독작(獨酌)’을 하며, 여기는 “내가 사랑하기에 어울리지 않는 곳”(〈위독한 사랑의 찬가〉)이라는 타자의 구시렁거림을 자기것으로 편취한다.
혼자 술 마시기는 사랑의 동시적 주체인 ‘나’의 일방적 소외에서 빚어진 슬픔과 아픔에서 벗어나려는 가장 쉬운 자기 망각/위로의 한 방식이다.
끝난 사랑은 떠나고 혼자 남은 자에게 그리움과 상처를 내려놓는다. 왜일까?
“당신의 처음인 냄새를 나는 늘 마지막으로 간직할 뿐이어서 처음과 마지막이 한 몸으로 비틀리는 자세의 닿을 수 없는 냄새를 영원히 당신 것으로 기억한다. 내게 다녀간 그 숱한 것들 가운데 당신밖에 나를 이 끝까지 데려다 놓은 처음은 없다”(〈당신의 처음인 마지막 냄새의 자세〉)라는 모호한 구절은 그 상처의 원인이 잃어버린 처음[당신]은 언제나 영구적으로 회복 불가능한 ‘나’의 마지막이 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당신은 ‘나’를 ‘당신의 처음인 냄새’에서 분리시켜 그것이 휘발되어버린, 즉 그것을 영원한 상실의 자리에 데려다놓는 존재다. 그런 맥락에서 당신은 ‘나’의 사랑이면서 동시에 ‘나’에게서 사랑을 앗아가는 존재라는, 즉 사랑을 주었다가 사랑을 빼앗는 모순된 이중성의 행위자라는 함의를 갖는다.
“모든 지나간 사랑은 내 생애에/진실로 나를 찾아 온 사랑 아니었다고 말해”(〈독백〉)
버리는 것은 진실이 아니다. ‘나’에게 왔다가 지나간 사랑들은 사실은 진실로 ‘나’를 찾아왔던 사랑들이다. 다만 그 사랑들이 ‘나’에게서 사라져 없을 뿐이다.
사랑은 사라지고 그 뒤에 그것에 소외된 취객이 하나 남을 뿐이다. 그러므로 “상처는 나의 체질”(〈상처적 체질〉)이라고 중얼거리는 취객이 있다면, 그는 분명 실연자일 것임에 틀림없으니 그냥 지나치지 말고 그를 붙잡아 술집으로 끌고 들어가 한 잔 더 마실일이다.
류근(1966~ )은 경상북도 문경에서 태어나 충청북도 충주에서 자랐다. 중앙대학교 문예창작과를 나와 시를 쓰는 사람이다. 1992년에 문화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어 문단 등단 절차를 마쳤으나 지면에 시를 발표하지는 않았다. 2010년에 꽁꽁 묶어두었던 시고(詩稿)들을 갈무리해서 문학과지성사에서 《상처적 체질》이라는 첫 시집을 펴냈다. 나는 시인을 알지 못한다. 시집에 따르면 시인은 술꾼이다.
“사람을 만나면 술을 마셨다/술자리가 끝나기 전까지는/떠나지 않으리라는 기대 때문이었다”(〈극지(極地)〉) “낮은 여름이고 밤부터 가을이었는데/여름부터 취해 있던 내가 가을 술집에 앉아/또 술을 마시고 있었던 것인지”(〈낮은 여름이고 밤부터 가을〉), “억울하다 술 마실 때에만 불쑥 자라나는 인생이여”(〈머나먼 술집〉)와 같은 술꾼의 자부심이 잔뜩 묻어나는 시구들을 보면 시인은 술꾼으로서 남부럽지 않은 무수한 일탈과 위반의 스펙들을 쌓아온 것 같다.
시집을 찬찬히 들여다보고, 미루어 짐작컨대, 술 마시는 곡절은 대개 ‘연애’와 상관이 있다. 그 흘러넘치는 술들 안팎으로 지독한 ‘연애’가 배치되어 있다. 그 ‘연애’의 진폭은 눈썹 한끝에 어린 꽃나무들을 데려다준 첫사랑에서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는 이유로 일방적으로 버림받아 너무 아픈 실연의 사랑까지 꽤 넓고 다양하다.
사진 : 김선아
장석주 시인·문학평론가
...
속. 반가사유 / 이외수
이제는 눈이 와도
행여
지나가는 여자와 눈 맞을
일도 없고
우라질 놈의 칼바람
멱살을 잡아 흔드는 거리
그날 따라
너무 낯설어
버릇처럼
땡전 한푼 없이
문을 밀고 들어선 방석집
미아리 눈물 고개
님이 넘던 이별 고개
청승으로 한숨으로
몇 겹씩 밤이 깊었네
작부의 허벅지를 쓰다듬으며
불현듯
이대로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는
생각도 했었네
씨팔 저 인간은
오늘도 외상이래여
새벽녘
작부년 욕설을 뒤로 하고
밖으로 나오면
마냥 홀가분한 인생
이제 억울할 일도 없고
후회할 일도 없었네
골목길 가득히
흑백영화의 한 장면처럼
함박눈만 자욱하게
쏟아져 내렸네
2010, 12, 17일 twtkr에서 작성된 글
이외수
'♧ 문학의 향기 > ♣ 영상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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