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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의 향기/♣ 영상시

찬비 내리고 - 편지1 / 나희덕

by kimeunjoo 2010. 9. 19.
         

         

         

         

         

        찬비 내리고 - 편지1 / 나희덕

         

         

        우리가 후끈 피워냈던 꽃송이들이

        어젯밤 찬비에 아프다 아프다 아프다 합니다

        그러나 당신이 힘드실까봐

        저는 아프지도 못합니다

        밤새 난간을 타고 흘러내리던

        빗방울들이 또한 그러하여

        마지막 한 방울이 차마 떨어지지 못하고

        공중에 매달려 있습니다

        떨어지기 위해 시들기 위해

        아슬하게 저를 매달고 있는 것들은

        그 무게의 눈물겨움으로 하여

        저리도 눈부신가요

        몹시 앓을 듯한 이 예감은

        시들기 직전의 꽃들이 내지르는

        향기 같은 것인가요

        그러나 당신이 힘드실까봐

        저는 마음껏 향기로울 수도 없습니다

         

         

         

         

        나뭇가지가 오래 흔들릴 때 - 편지 2 / 나희덕

         

        세상이 나를 잊었는가 싶을 때

        날아오는 제비 한 마리 있습니다

        이젠 잊혀져도 그만이다 싶을 때

        갑자기 날아온 새는

        내 마음 한 물결 일으켜놓고 갑니다

        그러면 다시 세상 속에 살고 싶어져

        모서리가 닳도록 읽고 또 읽으며

        누군가를 기다리게 되지요

        제비는 내 안에 깃을 접지 않고

        이내 더 멀고 아득한 곳으로 날아가지만

        새가 차고 날아간 나뭇가지가 오래 흔들릴 때

        그 여운 속에서 나는 듣습니다

        당신에게도 쉽게 해 지는 날 없었다는 것을

        그런 날 불렀을 노랫소리를

         

         

         

        젖지 않는 마음 - 편지 3 / 나희덕

         

        여기에 내리고

        거기에는 내리지 않는 비

        당신은 그렇게 먼 곳에 있습니다

        지게도 없이

        자기가 자기를 버리러 가는 길

        길가의 풀들이나 스치며 걷다 보면

        발 끝에 쟁쟁 깨지는 슬픔의 돌멩이 몇개

        그것마저 내려놓고 가는 길

        오로지 젖지 않는 마음 하나

        어느 나무그늘 아래 부려두고 계신가요

        여기에 밤새 비 내려

        내 마음 시린 줄도 모르고 비에 젖었습니다

        젖는 마음과 젖지 않는 마음의 거리

        그렇게 먼 곳에서

        다만 두 손 비비며 중얼거리는 말

        그 무엇으로도 돌아오지 말기를

        거기에 별빛으로나 그대 총총 뜨기를

         

         

         

        낯선 편지 / 나희덕

         

        오래 된 짐꾸러미에서 나온

        네 빛 바랜 편지를

        나는 도무지 해독할 수가 없다

         

        건포도처럼 박힌 낯선 기호들

        사랑이 발명한 두 사람만의 언어를

        어둠 속에서도 소리내어

        읽곤 했던 날이 있었다

         

        그러나 어두운 저편에서

        네가 부싯돌을 켜대고 있다 해도

        나는 이제 그 깜박임을

        알아볼 수 없다

         

        마른 포도나무 가지처럼

        내게는 더 이상 너의

        피가 돌지 않고

         

        온몸이 눈이거나

        온몸이 귀가 되어도

        읽을 수 없다

         

        오래된 짐꾸러미 속으로

        네 편지를 다시

        접어넣는 순간

         

        나는 듣고 말았다

        검은 포도알이

        굴러 떨어지는 소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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