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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의 향기/♣ 영상시

바퀴벌레는 진화 중 - 김기택

by kimeunjoo 2010. 5. 22.

                                      바퀴벌레는 진화 중/김기택                                  

 

 

 

믿을 수 없다. 저것들도 먼지와 수분으로 된 사람 같은 생물이란 것을.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시멘트과 살충제 속에서만 살면서도 저렇게 비대해질 수 있단 말인가. 살덩이를 녹이는 살충제를 어떻게 가는 혈관으로 흘러보내며 딱딱하고 거친 시멘트를 똥으로 바꿀 수 있단 말인가. 입을 벌릴 수밖에 없다. 쇳덩이의 근육에서나 보이는 저 고감도의 민첩성과 기동력 앞에서는.


람들이 최초로 시멘트를 만들어 집을 짓고 살기 전, 많은 벌레들을 씨까지 일시에 죽이는 독약을 만들어 뿌리기 전, 저것들은 어디에 살고 있었을까. 흙과 나무, 내와 강, 그 어디에 숨어서 흙이 시멘트가 되고 다시 집이 되기를, 물이 살충제가 되고 다시 먹이가 되기를 기다리고 있었을까. 빙하기, 그 세월의 두꺼운 얼음 속 어디 수만 년 썩지 않을 금속의 씨를 감추어 가지고 있었을까.


봇처럼, 정말로 철판을 온몸에 두른 벌레들이 나올지 몰라, 금속과 금속 사이를 뚫고 들어가 살면서 철판을 왕성하게 소화시키고 수억 톤의 중금속 폐기물을 배설하면서 불쑥불쑥 자라는 잘 진화된 신형 바퀴벌레가 나올지 몰라. 보이지 않는 빙하기, 그 두껍고 차가운 강철의 살결 속에 씨를 감추어 둔 채 째가 이르기를 기다리고 있을지 몰라. 아직은 암회색 스모그가 그래도 맑고 희고, 폐수가 너무 깨끗한 까닭에 숨을 쉴 수가 없어 움직이지 못하고 눈만 뜬 채 잠들어 있는지 몰라.

 

 

수화(手話) /김기택

 

 

두 청년은 격렬한 논쟁을 벌이고 있는 것 같았다.
승객이 드문드문 앉아 있는 버스 안이었다.
둘은 지휘봉처럼 떨리는 팔을 힘차게 휘둘렀고
그때마다 손가락과 손바닥에서는
새 말들이 비둘기나 꽃처럼 생겨나곤 하였다.
말들은 점점 커지고 빨라졌다.
나는 눈으로 탁구공을 따라가듯 부지런히 고개를 움직였다.
때로 그들은 너무 격앙되어
상대방 손과 팔 사이의 말을 장풍으로 잘라내고
그 사이에다 제 말을 끼워넣기도 하였다.
나는 그들의 대화에서 끓어 넘친 침들이
내 얼굴로 튈까봐 가끔 움찔하였다.
고성이 오갈 때에는 그들도 꽤나 시끄러웠을 것이다.
운전기사가 공공장소에서는 조용히 해달라고 할까봐
가끔은 눈치가 보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버스는 두 사람 말고는 아무도 없는 듯 조용했고
이따금 손바람 서걱거리는 소리만 들려왔다.

 

소/ 김기택

소의 커다란 눈은 무언가를 말하고
있는 듯한데 나에겐 알아들을 수 있는 귀가 없다
소가 가진 말은 다 눈에 들어있는 것 같다

말은 눈물처럼 떨어질 듯 그렁그렁 달려 있는데
몸 밖으로 나오는 길은 어디에도 없다
마음 한 움큼씩 뽑혀나오도록 울어 보지만
말은 눈 속에서 꿈쩍도 하지 않는다

수천만 년 말을 가두어두고

그저 끔벅거리고만 있는
오, 저렇게도 순하고 동그란 감옥이여

어찌해볼 도리가 없어서
소는 여러번 씹었던 풀줄기를 배에서 꺼내어

다시 짓이기고 삼켰다간 또 꺼내어 짓이긴다

 


 

무단횡단 - 김기택

 

 

갑자기 앞차가 급정거했다. 박을 뻔했다.
뒷좌석에서 자던 아이가 바닥으로 굴러 떨어졌다.
습관화된 적개심이 욕이 되어 튀어나왔다.

앞차 바로 앞에서 한 할머니가 길을 건너고 있었다.
횡단보도가 아닌 도로 복판이었다.
멈춰선 차도 행인도 놀라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좁고 구불구불하고 한적한 시골길이었다.
걷다보니 갑자기 도로와 차들이 생긴 걸음이었다.
아무리 급해도 도저히 빨라지지 않는 걸음이었다.
죽음이 여러 번 과속으로 비껴간 걸음이었다.

그보다 더한 죽음도 숱하게 비껴간 걸음이었다.
속으로는 이미 오래 전에 죽어본 걸음이었다.
이제는 죽음도 어쩌지 못하는 느린 걸음이었다.

걸음이 미처 인도에 닿기도 전에 앞차가 튀어나갔다.
동시에 뒤에 늘어선 차들이 사납게 빵빵거렸다.

 

 

양철 낙엽 / 김기택

또 겨울.
나무 밑에 전봇대와 담벼락 주변에
몰려 있던 낙엽들이
아스팔트 위로 쏟아져 나온다.
구두들에게 밟히고
타이어들이 밀어낸 바람에 날린다
아스팔트와 마찰할 때마다
속이 텅 빈 금속성 소리가
잎맥에서 새어 나온다.
오프너로 딴 날카로운 깡통뚜껑 자국이
잎 가장자리에 삐죽삐죽 나와 있다.
한때 양철에 그려져 있던
푸른 과실의 그림과 바람의 긴 글자들은
이미 붉은 녹이 되어 있다.
쓰레기와 뒤섞여
담을 오를 듯 홍게들처럼 우글거린다.
산성비 때문에 썩지 않는다고 한다.

 

얼음 속의 밀림 / 김기택

 

겨울 아침 유리창 가득 반짝이는
성에를 본다. 유리창에 만발한 하얀 식물
꽃과 잎과 줄기를 본다.
무엇일까 막힘없는 물방울들을
섬세한 꽃과 잎의 무늬 안에 가두어 놓은 힘은

 

결빙의 힘 속에
식물의 본능이 숨어 있었던 것일까.

땅 속에서 물을 퍼올려
잎을 피우고 꽃을 터뜨리는 생명의 비밀이
얼음 속에도 있었던 것일까.
모든 흐트러짐과 자유로움을
정교하고 엄격한 계율로 만드는
서슬 푸른 법(法)과 도(道)의 세계가
결빙의 과정 속에 있었던 것일까

 

이 화려한 무늬를 들여다보면

막 얼기 시작한 물이
결빙의 칼날과 환희를 견디다가
절정의 순간 얼음의 결정체마다 살라 놓은
투명한 불의 흔적이 보인다.

 

겨울 아침 하얀 식물 성에를 보며
문득 지상의 모든 얼음들을 떠올린다.
푸른 얼음들 속에 울창하게 퍼져 있는
또 다른 원시림을 생각해 본다.
청정한 법(法)과 도(道)가
열대의 온갖 동식물처럼
뿌리 내리고 자라 넘실거리는
뛰고 날고 헤엄치며 노는
투명하고 차가운 밀림을 생각해 본다.

 

곱추 - 김기택

 

지하도

그 낮게 구부러진 어둠에 눌려

그 노인은 언제나 보이지 않았다

출근길

매일 그 자리 그 사람이지만

만나는 건 늘

빈 손바닥 하나, 동전 몇 개 뿐이었다

가끔 등뼈아래 숨어사는 작은 얼굴하나

시멘트를 응고시키는 힘이 누르고 있는 흰 얼굴하나

그것마저도 아예 안 보이는 날이 더 많았다

하루는 무덥고 시끄러운 점오의 길바닥에서

그 노인이 조용히 잠든 것을 보았다

등에 커다란 알을 하나 품고 그 알속으로 들어가

태아처럼 웅크리고 자고 있었다

곧 껍질을 깨고 무엇이 나올 것 같아

철근 같은 등뼈가 부서지도록 기지개를 하면서

그것이 곧 일어날 것 같아

그 알이 유난히 크고 위태로워 보였다

거대한 도시의 소음보다 더 우렁찬

숨소리 나직하게 들려오고

웅크려 알을 품고 있는 어둠위로

종일 빛이 내리고 있었다

 

다음날부터 노인은 보이지 않았다

 

 

 

잠깐 그와 눈이 마주쳤다 - 김기택

 

 

잠깐 그와 눈이 마주쳤다

낯이 많이 익은 얼굴이지만

누구인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너무나도 낯선 낯익음에 당황하여

나는 한동안 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도 내가 누구이지 잠시 생각하는 눈치였다

그는 쓰레기 봉투를 뒤지고 있엇다

그는 고양이 가죽 안에 들어가 있었다

오랫동안 직립이 몸에 배었는지

네 발로 걷는 것이 좀 어색해 보였다

그는 쓰레기 뒤지는 일을 방해한 나에게 항의하듯 

야오옹, 하고 감정을 실어 울더니

뜻밖에 아기 울음소리가 나는 제 목소리가 이상해서 

견딜 수 없다는 듯 얼른 입을 다물었다

그는 다른 고양이들처럼 서둘러 달아나지 않았다

슬픈 동작을 들긴 제 모습에 화가 난 듯

고개를 숙이더니 천천히 돌아서서 한참동안 멀어져갔다

 

 

고양이 죽이기- 김기택

 

 

그림자처럼 검고 발자국 소리 없는 물체 하나가
 갑자기 도로로 뛰어들었다.
 급히 차를 잡아당겼지만
 속도는 강제로 브레이크를 밀고 나아갔다.
 차는 작은 돌멩이 하나 밟는 것만큼도 덜컹거리지 않았으나
 무언가 부드러운 것이 타이어에 스며든 것 같았다.
 얼른 백미러를 보니 도로 한가운데에
 털목도리 같은 것이 떨어져 있었다.
 야생동물들을 잡아먹는 것은, 이미 오래전부터,
 호랑이나 사자의 이빨과 발톱이 아니라
 잇몸처럼 부드러운 타이어라는 걸 알 리 없는 어린 고양이였다.
 승차감 좋은 승용차 타이어의 완충장치는
 물컹거리는 뭉개짐을 표 나지 않게 삼켜버렸던 것이다.
 씹지 않아도 혀에서 살살 녹는다는
 어느 소문난 고깃집의 생갈비처럼 부드러운 육질의 느낌이
 잠깐 타이어를 통해 내 몸으로 올라왔다.
 부드럽게 터진 죽음을 뚫고
 그 느낌은 내 몸 구석구석을 핥으며
 쫄깃쫄깃한 맛을 오랫동안 음미하고 있었다.
 음각무늬 속에 낀 핏자국으로 입맛을 다시며
 타이어는 식욕을 마저 채우려는 듯 더 속도를 내었다.

 

 

늘구멍 속의 폭풍 / 김기택
 
 

 너무 오랫동안 사용해서 그의 육체는 낡고 닳아있다. 숨을 쉴 때마다 목구멍과 폐에서 가르랑가르랑 소리가 난다. 찰진 분비물과 오물이 통로를 막아 바늘구멍처럼 좁아진 숨구멍으로 그는 결사적으로 숨을 쉰다. 너무 열심히 숨을 쉬느라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다. 숨이 차면 자주 입이 벌어진다. 벌어진 입으로 침이 질질 흘러 나오지만 너무 심각하게 숨을 쉬느라 그것을 닦을 겨를이 없다.

 

 밤이 되면 숨쉬는 소리 외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목구멍에서 그르렁거리는 낮은 소리는 때로 갑자기 강해져서 거목을 뽑고 지붕을 날려버릴 것처럼 용틀임을 한다. 휘몰아치는 바람의 힘에 흔들려 그의 몸이 세차게 흔들리다가 이윽고 가래와 침을 뚫고 기침이 뿜어져 나온다. 기침이 나올 때마다 그는 목을 붙잡고 컹컹 짖으며 방바닥에서 뒹군다. 몸 속에서 한바탕 기운을 쓴 바람은 차츰 조용해져서 다시 허파에 얌전히 들어앉아 가르릉거린다.

 

 필사적으로 바람을 견디다가 찢어진 비닐 조각처럼, 떨어져 덜컹거리는 문짝처럼, 망가지고 허술해진, 바람을 더 견디기엔 불안한 몸뚱어리를 그는 조심스럽게 침대 위에 눕힌다. 조금이라도 호흡이 거칠어지거나 불규칙하면 몸 속에 쉬고 있는 폭풍이 꿈틀거린다. 숨이 바늘구멍을 무사하게 통과하게 하느라 그는 아슬아슬 호오호오 숨을 고른다. 불손했고 반항적이었던 생각들과 뜨겁고 거침없었던 감정들로 폭풍에 맞서 온 몸은 폭풍을 막기에는 이젠 너무 가볍고 가냘프다. 고요한 마음, 꿈 없고 생각 없는 잠이 되려고 그는 더 웅크린다

 

뚜레 /김기택


두 콧구멍 사이에

수갑처럼 둥근 자물통이 채워져 있네.

두 콧구멍이 괜히 둘로 갈라질 리도 없고

콧구멍을 열어 그 안에 은밀히 감춰 둘 것도 없으니

콧구멍 금고에서 꺼낼 특별한 보물도 없을 터인데

이상하다.

죽음이 두 콧구멍을 영원히 갈라놓을 때까지

누구도  그 안에 들어갈 수 없도록

자물통에서 열쇠구멍을 완벽하게 없애 버렸으니!


코는

소의 몸에서 가장 예민하고 부드러운 곳

붉은 혀만이 수시로 들락거리는 깊은 구멍일 뿐인데

저렇게 단단하게 잠가 둔 걸 보니 수상해.

그렇다면 그건 순결을 감금시킨 정조대?

그 구멍에서 가끔 뜨거운 공기가 나오고

신음소리도 나오고

히고 걸쭉한 분비물로 나오는 걸 보니 더욱 수상해.

 

근질근질해서 결딜 수 없는 열쇠

열쇠구멍 없는 자물쇠를 열 유일한 열쇠, 도끼가

어느 날 자물통을 부술 거야.

하나 도끼가 범할 일을 자세히 열거하고 싶진 않네.

저렇게 일평생 순결을 감금당하고도

도끼에 겁탈 당할 이마

겁탈 당할 피 겁탈 당할 죽음을,

겁탈 당한 후에 다시 발가벗겨질 가죽과

그 속에 든 발갛고 촉촉하고 말랑말랑한 순결을

 

 

가시 / 김기택

 

가시가 되다 말았을까 잎이 되다 말았을까

날카로운 한 점 끝에 침을 모은 채

가시는 더 자라지 않는구나

 

걸어다닐 줄도 말할 줄도 모르고

남을 해치는 일이라곤 도저히 모르는

저 푸르고 순한 꽃나무 속에

어떻게 저런 공격성이 숨어 있었을끼

수액 속에도 불안이 있었던 것일까

꽃과 열매를 노리는 힘에 대한 공포가 있었던 것일까

꽃을 꺾으러 오는 놈은 누구라도

이 사나운 살을 꽂아 피를 내리라

그런 일념의 분노가 있었던 것일까

 

한 뿌리에서 올라온 똑같은 수액이건만

어느 것은 꽃이 되고

어느 것은 가시가 되었구나

 

 

물도 불처럼 타오른다 김기택

 

아직 김이나 수증기라는 말을 모르는 아이가
끓는 물을 보더니 물에서 연기 난다고 소리친다.
물에서 연기가 난가?
그렇지. 물이 끓는다는 건 물이 탄다는 말이지.
수면(水面)을 박차고 솟구쳐오르다 가라앉는
뿔같이 생긴, 혹같이 생긴 물의 불길들,
그 물이 탄 연기가 허공으로 올라가는 거지.
잔잔하던 수면의 저 격렬한 뒤틀림!
나는 저 뒤틀림을 닮은 성난 표정을 기억하고 있다.
심장에서 터져나오는 불길을 견디느라
끓는 수면처럼 꿈틀거리던 눈과 눈썹, 코와 입술을.
그때 입에서는 불길이 밀어올린 연기가
끓는 소리를 내며 이글이글 피어오르고 있었지.
그 말의 화력은 바로 나에게 옮겨붙을듯 거세었지.
물이나 몸은 기름이나 나무처럼 가연성이었던 것.
언제든 흔적없이 타버릴 수 있는 인화물이었던 것.
지금 솥 밑에서 타오르는 불길은
솥 안에서 구슬처럼 동그란 불방울이 되어
무수히 많은 뿔처럼 힘차게 수면을 들이받는다.
악을 쓰며 터지고 일그러지고 뒤틀리던 물은
부드러운 물방울 연기가 되어 공기 속으로 스며든다

 

 

 

종유석 / 김기택

 



동굴 따라 꾸불꾸불 길게 누운 어둠 속에서
이 딱딱한 바위들도 한때는 흘러다녔구나.
어둠 구석구석을 꼬리치레 도롱뇽처럼 기어다녔구나.
얼마나 아름다웠을까, 고드름으로 수세미로 버섯으로
꽃으로 아이스크림으로 마음껏 녹았었던 움직임들은,
한번도 머릿속에 들어가보지 못한 생각처럼
바위는 돌을 벗어나 유연하고도 자유로웠겠구나.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형체가 되어
생각 속에 박힌 편견들처럼 튼튼해지고 말았구나
이제 저 부드러운 아이스크림처럼 깨어질지언정
다시는 움직여 꽃이 되지 못하리라.
물방울 떨어질 때마다 동그란 소리를 내며
퍼져 나가던 깊은 물은 그 물줄기들은
돌 속으로 들어가 돌과 섞이고 돌을 움직이더니
그 모습 그대로 영원히 돌이 되었구나.

 

계란 프라이 / 김기택

 

자궁처럼 둥글고
정액처럼 걸죽하고 투명한 액체인
병아리는
이윽고 납작해진다 후라이팬 위에서
점점 하얗게 굳어지면서
꿈틀거린다 뜨거운 식용유를 튀기며
꿈틀거린다 불투명한 방울을 들썩거리며
꿈틀거린다 고소한 비린내를 풍기며
꿈틀거린다 굳어버린 눈 굳어버린 날개로
꿈틀거린다 보이지 않는 등뼈와 핏줄을 오그라뜨리며

한 번도 떠보지 못한 눈과
한 번도 뛰어보지 못한 심장과
아무 것도 먹어본 적이 없는 노란 부리와
아무 것도 싸본 적이 없는 똥구멍이
평등하게 뒤섞여 굳어버린
계란 후라이
흰 접시 위에 담겨진다

 

 

멸치 / 김기택


굳어지기 전까지 저 딱딱한 것들은 물결이었다

파도와 해일이 쉬고 있는 바닷속

지느러미의 물결 사이에 끼어

유유히 흘러다니던 무수한 갈래의 길이었다

그물이 물결 속에서 멸치들을 떼어냈던 것이다

햇빛의 꼿꼿한 직선들 틈에 끼이자마자

부드러운 물결은 팔딱거리다 길을 잃었을 것이다

바람과 햇볕이 달라붙어 물기를 빨아들이는 동안

바다의 무늬는 뼈다귀처럼 남아

멸치의 등과 지느러미 위에서 딱딱하게 굳어갔던 것이다

모래 더미처럼 길거리에 쌓이고

건어물집의 푸석한 공기에 풀리다가

기름에 튀겨지고 접시에 담겨졌던 것이다

지금 젓가락 끝에 깍두기처럼 딱딱하게 집히는 이 멸치에는

두껍고 뻣뻣한 공기를 뚫고 흘러가는

바다가 있다 그 바다에는 아직도

지느러미가 있고 지느러미를 흔드는 물결이 있다

이 작은 물결이

지금도 멸치의 몸통을 뒤틀고 있는 이 작은 무늬가

파도를 만들고 해일을 부르고

고깃배를 부수고 그물을 찢었던 것이다

 

 

물도 불처럼 타오른다 / 김기택

 


아직 김이나 수증기라는 말을 모르는 아이가
끓는 물을 보더니 물에서 연기 난다고 소리친다.
물에서 연기가 난다?
그렇지. 물이 끓는다는 건 물이 탄다는 말이지.
수면(水面)을 박차고 솟구쳐오르다 가라앉는
뿔같이 생긴, 혹같이 생긴 물의 불길들,
그 물이 탄 연기가 허공으로 올라가는 거지.
잔잔하던 수면의 저 격렬한 뒤틀림!
나는 저 뒤틀림을 닮은 성난 표정을 기억하고 있다.
심장에서 터져나오는 불길을 견디느라
끓는 수면처럼 꿈틀거리던 눈과 눈썹, 코와 입술을.
그때 입에서는 불길이 밀어올린 연기가
끓는 소리를 내며 이글이글 피어오르고 있었지.
그 말의 화력은 바로 나에게 옮겨붙을듯 거세었지.
물이나 몸은 기름이나 나무처럼 가연성이었던 것.
언제든 흔적없이 타버릴 수 있는 인화물이었던 것.
지금 솥 밑에서 타오르는 불길은
솥 안에서 구슬처럼 동그란 불방울이 되어
무수히 많은 뿔처럼 힘차게 수면을 들이받는다.
악을 쓰며 터지고 일그러지고 뒤틀리던 물은
부드러운 물방울 연기가 되어 공기 속으로 스며든다

 

 

사진속의 한 아프리카 아이 1 / 김기택

 

앞에서 바람이 불면

살갗은 갈비뼈 사이 앙상한 틈을 더 깊이 후벼판다

뒤에서 바람이 불면

푹 꺼진 배는 갑자기 둥글게 부풀어오른다

가는 뼈의 깃대를 붙잡고 나부끼는

검은 살갗

 

아이는 모래 위에 뒹구는 그릇을 내려다보고 있다

가는 막대기팔과 다리로 위태롭게 떠받친 머리통처럼

크고 둥근,

굶주릴수록 악착같이 질겨지는 위장처럼

텅 빈

그릇 하나.

 

 

상계동 비둘기/김기택

 

비둘기들은 상계역 전철 교각 위에 살고 있다
콘크리트 교각을 닮아 암회색이다
전동차가 쿵, 쿵, 쿵, 울리며 지나갈 때마다
비둘기들은 조금도 놀라지 않고
교각처럼 쿵, 쿵, 쿵, 자연스럽게 흔들린다
비둘기들은 교각 위에 나란히 앉아
자기들 집과 닮은 고층 아파트들을 바라본다
사람들이 아파트에서 거리를 내려다보듯
비둘기들도 상계역 주변 거리를 내려다본다
도로변 곳곳에 음식물 쓰레기와 물웅덩이가 있다
사람들이 노점에서 주전부리를 즐기는 동안
비둘기들도 거리에서 푸짐한 먹거리를 즐긴다
자동차들이 쉬지 않고 무서운 속도로 달려오지만
비둘기들은 가볍게 경적과 속도를 피하며
가게에서 물건을 고르듯 느긋하게 모이를 고른다
가랑이 사이로 비둘기가 활보하는 것도 모르고
사람들은 막연히 남의 구두가 지나갔겠거니 생각한다
비둘기들은 검은 먼지와 매연을 뒤집어쓰고
언제나 아스팔트를 보호색으로 입고 다녀서
상계역에 비둘기들이 사는지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머리 깎는 시간 / 김기택



이발사는 희고 넓은 천 위에
내 머리를 꽃병처럼 올려놓는다.
스프레이로 촉촉하게 물을 뿌린다.
이 무성한 가지를 어떻게 剪枝하는 게 좋을까
빗과 가위를 들고 잠시 궁리하는 눈치다.
이발소는 시계 초침 소리보다 조용하다.
시계만 가고 시간은 멈춘 곳에서
재깍재깍 초침 같은 가위가 귓가에 맑은 소리를 낸다.
그 맑은 소리를 따라간다. 가위 소리에서
찰랑찰랑 물소리가 나도록 귀 기울여 듣는다.
싹둑, 머리카락이 가윗날에 잘릴 때
온몸으로 퍼지는 차가운 진동.
후드득, 흰 천 위에 떨어지는 머리카락 덩어리들.
싹둑싹둑 재깍재깍 후드득후드득······
가위 소리는 점점 많아지고 가늘어지더니
창밖에 가득 빗방울이 떨어진다.
흙에, 풀잎에, 도랑에, 돌에, 유리창에, 양철통에
저마다 다른 빗소리들이 서로 겹쳐지는 소리.
처마에서 새끼줄처럼 굵게 꼬이며 떨어지는 소리.
물뿌리개로 찬물을 흠뻑 부으며
이발사는 어느새 내 머리를 감기고 있다.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내고 만져보니
머리가 더 동굴동글하고 파릇파릇하다.
비 온 뒤의 풀잎처럼 빳빳하다.

 

/ 김기택

 

바람 속에 아직도 차가운 발톱이 남아있는 3월

양지쪽에 누워있던 고양이가 네 발을 모두 땅에 대고

햇볕에 살짝 녹은 몸을 쭉 늘여 기지개를 한다

힘껏 앞으로 뻗은 앞다리,

앞다리를 팽팽하게 잡아당기는 뒷다리,

그 사이에서 활처럼 땅을 향해 가늘게 휘어지는 허리,

고양이 부드러운 등을 핥으며 순해지는 바람,

새순 돋는 가지를 활짝 벌리고

바람에 가파르게 휘어지며 우두둑 우두둑  늘어나는 나무들.

 

 

- 김 기 택

 

 

튼튼한 것 속에서 틈은 태어난다
서로 힘차게 껴안고 굳은 철근과 시멘트 속에도
숨쉬고 돌아다닐 길은 있었던 것이다
길고 가는 한 줄 선 속에 빛을 우겨넣고
버팅겨 허리를 펴는 틈
미세하게 벌어진 그 선의 폭을
수십년의 시간, 분, 초로 나누어본다
아아, 얼마나 느리게 그 틈은 벌어져온 것인가
그 느리고 질긴 힘은
핏줄처럼 건물의 속속들이 뻗어 있다
서울, 거대한 빌딩의 정글 속에서
다리 없이 벽과 벽을 타고 다니며 우글거리고 있다
지금은 화려한 타일과 벽지로 덮여 있지만
새 타일과 벽지가 필요하거든
뜯어보라 두 눈으로 활인해보라
순식간에 구석구석으로 달아나 숨을
그러나 어느 구석에서든 천연덕스러운 꼬리가 보일
틈! 틈, 틈, 틈, 틈틈틈틈틈......
어떤 철벽이라도 비집고 들어가 사는 이 틈의 정체는
사실은 한줄기 가냘픈 허공이다
하릴없이 구름이나 풀잎의 등을 밀어주던
나약한 힘이다
이 힘이 어디에든 스미듯 들어가면
튼튼한 것들은 모두 금이 간다 갈라진다 무너진다
튼튼한 것들은 결국 없어지고
가냘프고 나약한 허공만 끝끝내 남는다

 

교정 보는 여자 / 김기택 
 
  
 그녀의 눈으로 끊임없이 글자들이 지나간다. 글자들은 책상 위에 휴지통에 바닥에 어지럽

게 흩어져 있고 그녀는 종일 빠지고 넘어져 잘못된 글자들을 골라내어 제자리에 앉혀준다.

글자들은 모래알처럼 많고 모래알처럼 딱딱하다. 그녀의 눈 속에 촘촘하게 박힌다. 뜨겁고

눈부신 태양의 조명 아래 모래알 가득한 눈을 끔벅거리며 그녀는 낙타처럼 글자의 사막을

지나간다. 가끔 눈이 너무 아프면 잠시 감아보기도 한다. 글자들은 눈알에 깊이 음각되어,

감은 눈에 더 선명하게 나타난다. 그러면 그녀는 곧 음각된 글자들을 손등으로 꾹꾹 누르고

다시 눈을 열어 글자 속으로 들어간다.

 

 이윽고 교정지 위로 어둠이 내린다. 그녀는 넓고 두툼한 어둠으로 글자들을 덮는다. 오래

상처가 난 눈을 감는다. 눈물이 가만히 상처를 만져본다. 상처가 조금씩 소스라치며 씻긴

다. 이윽고 글자들은 어둠의 두툼함 속에 묻히고 그녀의 눈은 편안해 진다. 그녀는 손바닥

에 닿는 어둠을 더듬더듬 만져본다. 오래 오래 그 감촉들을 음미해 본다. 손가락 끝은 단맛

을 모르지요. 향긋한 냄새와 혀끝의 짜릿함도 모르지요. 하지만 남은 표면의 우툴두툴한 편

안함은 더 잘 안답니다. 허름한 잔등의 온기와 기침 속에서 떨리는 등뼈의 정다운 울림은

더 잘 안답니다.

 

  말속에 말들이 있다. 손가락 끝에서 만져졌던 말은 가슴에 와서 작은 누룩 속에 들어 있는

 빵처럼 크고 둥글어진다. 눈에서 녹아 가슴에 내린 글자의 상처들을 동그랗게 싸고 부풀어

 오르는 말의 향기들. 숨쉴 때마다 그녀의 부푼 가슴에서는 빵 굽는 냄새가 난다.

 

 

나무 / 김기택

 

대패로 깎아낸 자리마다 무늬가 보인다
희고 밝은 목질 사이를 지나가는
어둡고 딱딱한 나이테들
이 단단한 흔적들은 필시
겨울이 지나갔던 자리이리라
꽃과 잎으로 자유로이 드나들며 숨쉬던
모든 틈과 통로가
일제히 딱딱하게 오므리고
한겨울 추위를 막아내던 자리이리라
두꺼운 껍질도 끝내 견디지 못하고
거칠게 갈라졌던 자리이리라
뿌리가 빨아들인 맑은 자양들은
물관 속에서 호흡과 움직임을 멈추고
나무 밖의 거대한 힘에 귀기울였으리라
추위의 난폭한 힘은 기어코 껍질을 뚫고 들어가
수액 깊이 맵게 스며들었으리라
수액을 찾아 들어왔던 햇빛과 공기들은
그 자리에서 겨우내 얼었다가
독한 향기와 푸르고 진한 빛으로 익어갔으리라
해마다 얼마나 많은 잎과 꽃들이
이 무늬를 거쳐 봄에 이르렀을까
문틈인지도 직각의 모서리인지도 모르고
지느러미처럼 빠르고 날렵한 무늬들은
가구들 위를 흘러다니고 있다

 

명태 / 김기택


모두가 입을 벌리고 있다

모두가 머리보다 크게 입을 벌리고 있다

벌어진 입으로 쉬지 않고 공기가 들어가지만

명태들은 공기를 마시지 않고 입만 벌리고 있다

모두가 악쓰고 있는 것 같은데 다만 입만 벌리고 있다


그물에 걸려 한 모금이라도 더 마시려고 입을 벌렸을 때

공기는 오히려 밧줄처럼 명태의 목을 졸랐을 것이다

헐떡거리는 목구멍을 틀어막았을 것이다

숨구멍 막는 공기를 마시려고 입은 더욱 벌어졌을 것이고

입이 벌어질수록 공기는 더 세게 목구멍을 막았을 것이다


명태들은 필사적으로 벌렸다가 끝내 다물지 못한 입을

다시는 다물 생각이 없는 것 같다 끝끝내 다물지 않기 위해

입들은 시멘트처럼 단단하고 단호하게 굳어져 있다

억지로 다물게 하려면 입을 부숴 버리거나

아예 머리를 통째로 뽑아내지 않으면 안 된다


말린 명태들은 간신히 물고기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물고기보다는 막대기에 더 가까운 몸이 되어 있다

모두가 아직은 악쓰는 모습을 하고 있지만

입은 단지 그 막대기에 남아 있는 커다란 옹이일 뿐이다

그 옹이 주변에서 나이테는 유난히 심하게 뒤틀려 있다

 

/ 김기택

 

노인은 어두운 방 안에 혼자 놓여 있다.

며칠 전에 딸이 사놓고 간 귤
며칠 동안 아무도 까먹지 않은 귤
먼지가 내려앉는 동안 움직이지 않는 귤
움직이지 않으면서 조금씩 작아지는 귤
작아지느라 몸속에서 맹렬하게 움직이는 귤
작아진 만큼 쭈그러져 주름이 생기는 귤
썩어가는 주스를 주름진 가죽으로 끈질기게 막고 있는 귤
어두운 방 안에 귤 놓여 있다.

 

물은 좌판 위에 누워 있다 / 김기택


시장은 폭우를 맞은 듯 물이 흥건하였다.
물은 좌판 위에 누워 있었다.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움직이지 않는 눈알이 박혀 있었다.
숨 쉬지 않는 입을 버리고 있었다.
헤엄치지 않는 지느러미가 달려 있었다.
비늘 속에 뚱뚱하게 고여 있었다.

시장은 물이 타는 냄새로 가득하였다.
식당에 달린 환풍기 빨대들은
탁한 연기와 냄새를 맹렬하게 빨아내고 있었다.
죽은 물을 먹고 사는 물들이
의자마다 앉아서 굽고 삶아낸 물을 먹고 있었다.
뼈 사이로 물을 발라내고 씹느라
발음이 뭉개진 소리로 떠들고 있었다.

시장 옆 도로에서는
물을 가득 실은 차들이 지나다니고 있었다.
버스들이 와서 물을 울컥울컥 쏟아냈다가는
금방 새 물로 다시 채우고 있었다.
거리에서 파도치는 물이 시장까지 밀려와
좌판에 누운 물을 찰싹찰싹 건드려보고 있었다.
물은 해변의 바위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신생아 2 / 김기택(1957~ )

 

아기를 안았던 팔에서

아직도 아기 냄새가 난다

아가미들이 숨 쉬던 바닷물 냄새

두 손 가득 양수 냄새가 난다

하루종일 그 비린내로

어지럽고 시끄러운 머리를 씻는다

내 머리는 자궁이 된다

아기가 들어와 종일 헤엄치며 논다

 

 

전자레인지 / 김기택

 

불도 없는데

생선비늘 들썩거린다

이글이글, 입에서 거품이 나온다

퍽, 퍽, 몸 안에서 무언가 터지는 소리 들린다

은비늘 하나 다치지 않은, 바다에서 막 나온 것 같은 생선,

김과 열을 뿜는 흰 접시가 전자레인지에서 나온다

 

불도 없는데

할머니 얼굴 쭈글쭈글해진다

등뼈가 휘어지고 오그라들고 굳어진다

거친 숨, 가는 신음이 몸 안에서 터지는 소리가 들린다

깊은 주름을 흔들며 이 빠진 아이처럼 깔깔거리는 할머니

성한데 없는 맑고 어린 웃음이 경로당에서 나온다

 

 

타이어 / 김기택

 


놀라 돌아보니 승용차가 트럭앞에서 급정거 하고 있다
그 찢어지는 소리가 도살당하는 돼지의 비명소리를 닮았다

 

도로가 죽음으로 질주하는 타이어를 강제로 잡아당기니
두려움의 끝까지 간 마음이 내지르는 소리가 나는구나
둥글고 탄력있는 타이어도 극한 상황에서는
돼지의 성대를 지나가는 공기처럼 진동하며 우는구나

 

일그러진 승용차가 견인차에 끌려 떠난 자리에
두 줄기 길고 검은 타이어 자국이 남아 있다
최후까지 악쓰다가 아스팔트 바닥에 붙어버린 마음을
아무것도 모르는 타이어들이 씽씽 밟고 지나간다

 

 

갈치 / 김기택  


 어부는 잇몸을 드러내고 웃으며 긴 칼을 들어올린다. 칼은 은빛 강철의 빛살을 뿜고 있다. 칼자루에 힘을 주자 칼은 갑자기 둥글게 휘어지더니 힘껏 허리를 찬다. 빛살이 푸드덕거린다.

 아내는 기다란 참빗을 도마 위에 놓고 도막도막 자른다. 아이는 빗살무늬 사이에 낀 비린 공기를 발라먹는다. 아이의 목에 빗살 하나가 걸려 푸드덕거린다. 아이가 캑캑거리며 운다

 

 

송충이  김기택

 

아삭아삭 빛이 부서지는 소리
송충이가 솔잎을 갉아먹는다
나뭇가지인 줄 알고 송진이
송충이 혈관을 지나간다
부서진 빛이 송충이 내장 속에서
퍼진다 꿈틀거리며 간다

솔잎인 줄 알고 송충이 털 속으로
수액이 송충이 털 속으로 들어간다
선인장 가시처럼 뿌리내린
푸른 빛 속에 뿌리내린 송충이 털
내장인 줄도 모르고 섬유질 속으로
꽃인 줄 알고 털 끝으로 희고 가는 선 끝으로

 

 

나무들 / 김기택

 

또 겨울.

나무들이 몸을 말린다.

한여름 내내 나뭇잎에서 쏟아낸 푸른 분비물이

누렇게 되도록 말린다.

하루 세 끼 꼬박꼬박 햇빛을 빨아먹던 팽팽한 잎이

갑자기 쭈글쭈글해지도록 말린다.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반짝거리던 잎이

과자 봉지처럼 바삭바삭 구겨지도록 말린다.

아스팔트 위를 구르는 잎에서

양철 조각 갈라지는 소리가 나도록 말린다.

가지마다 커다란 파도록 만들며 출렁거리던

무서운 바람도 말린다.

한여름 광합성으로 부지런히 키운 높다란 물통을

기둥째 말린다.

두꺼운 나무껍질 쩍쩍 갈라지도록 말린다.

한겨울 독한 추위가 또 몸속에 들어와 살도록

그 매운 맛에 단내가 나도록

말린다.

 

 

직선과 원 / 김기택

 

옆집에 개가 생김

말뚝에 매여 있음

개와 말뚝 사이 언제나 팽팽함

한껏 당겨진 활처럼 휘어진 등뼈와

굵고 뭉툭한 뿌리 하나로만 버티는 말뚝

그 사이의 거리 완강하고 고요함

개 울음에 등뼈와 말뚝이 밤새도록 울림

밤마다 그 울음에 내 잠과 악몽이 관통당함

날이 밝아도 개와 말뚝 사이 조금도 좁혀지지 않음

 

직선 :

등뼈와 말뚝 사이를 잇는 최단거리

온몸으로 말뚝을 잡아당기는 발버둥과

대지처럼 미동도 않는 말뚝 사이에서

조금도 늘어나거나 줄어들지 않는 고요한 거리

원 :

말뚝과 등거리에 있는 무수한 등뼈들의 궤적

말뚝을 정점으로 좌우 위아래로 요동치는 등뼈

아무리 격렬하게 흔들려도 오차 없는 등거리

제자리에서 껑충껑충 뛰기도 하고 달리기도 함

굽어진 등뼈 펴지지 않음

개와 말뚝 사이 아무것도 없는데

등뼈, 굽어진 채 뛰고 꺾인 채 달림

말뚝에서 제법 먼 곳까지 뛰쳐나갔으나 곧 되돌아옴

말뚝 주위를 맴돌기만 함

개와 말뚝 사이 여전히 팽팽함

격렬할수록 완변한 원주의 곡선

 

 

개와 말뚝 사이의 거리와 시간이

이제는 철사처럼 굳어져 더 이상 움직이지 않음

오늘 주인이 처음 개와 말뚝 사이를 끊어놓음

말뚝 없는 등뼈 어쩔 줄 모름

 

 

김기택 시인

 

 

1957년 경기도 안양에서 출생하였으며 중앙대 영문과를 졸업하였다. 1989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시 「꼽추」가 당선되면서 시단에 등단하였다. 시집으로 『태아의 잠』(1992), 『바늘구멍 속의 폭풍』(1994), 『사무원』(1999)이 있으며 김수영문학상(1995), 현대문학상(2001), 이수문학상(2004), 미당문학상(2004)을 수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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