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의 시 모음
가을엽서 - 안도현
한 잎 두 잎 나뭇잎이
낮은 곳으로
자꾸 내려앉습니다
세상에 나누어줄 것이 많다는 듯이
나도 그대에게 무엇을 좀 나눠주고 싶습니다
내가 가진 게 너무 없다 할지라도
그대여
가을 저녁 한 때
낙엽이 지거든 물어보십시오
사랑은 왜
낮은 곳에 있는지를
가을은 눈眼의 계절 - 김현승
이맘때가 되면
당신의 눈은 나의 마음
아니, 생각하는 나의 마음보다
더 깊은 당신의 눈입니다
이맘때가 되면
낙엽들은 떨어져 뿌리에 돌아가고
당신의 눈은 세상에로 순수한 언어로 변합니다
이맘때가 되면
내가 당신에게 드리는 가장 아름다운 선물은
가을 하늘 만큼이나 멀리멀리 당신을 떠나는 것입니다
떠나서 생각하고
그눈을 나의 영혼 안에 간직하여 두는 것입니다
낙엽들이 지는 날 가장 슬픈 것은
우리들 심령에는 가장 아름다운 것 ....
가을은 아름답다 주요한
빗소리 그쳤다 잇는
가을은 아름답다
빛 맑은 국화송이에
맺힌 이슬 빛나고
꿩 우는 소리에 해 저무는
가을은 아름답다
곡식 익어 거두기에 바쁘고
은하수에 흰 돛대 한가할 때
절 아래 높은 나무에
까마귀 소리치고
피묻은 단풍잎 바람에 날리는
가을은 아름답다
물없는 물레방아 돌지 않고
무너진 섬돌 틈에서
달 그리운 귀뚜라미 우지짖는
멀리 있는 님생각 간절한
한 많은 철이여!
아름다운 가을이여!
가을의 기도 김현승(1913-1975)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낙엽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
겸허한 모국어로 나를 채우소서
가을에는
사랑하게 하소서
오직 한사람을 택하게 하소서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이 비옥한
시간을 가꾸게 하소서
가을에는 호올로 있게 하소서
나의 영혼,
굽이 치는 바다와
백합의 골짜기를 지나
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 같이
<옹호자의 노래> 선명문화사.1963
가을의 끝 릴케
언제부턴가 나는 모든 것이
변하여 가는 것을 보아 온다
일어서서 행동하고,
죽이고, 서럽게 하는 것들을
흐르는 시간의 사이사이에
정원들은 어드덧 모습이 달라진다
노랗게 물든던 정원의
누렇게 되어 비린 서서한 황페
길은 정말 멀기도 하였다
지금 텅 빈 정원에서
가로수길 너머로 바라다보면
엄숙히 드리운 닫힌 하늘을
아득히 먼 바다 끝까지
거의 볼 수가 있다
가을의 노래 베들렌느(1844-1896)
가을날
바이올린의
긴 흐느낌
단조로운 우울로
내 마음
쓰라려
종소리 울리면
숨막히고
창백히
옛날을
추억하며
눈물짓노라
그리하여 나는 간다
모진 바람이
날 휘몰아치는 대로
이리저리
마치 낙엽처럼
<풍자시>
가을의 소원 안도현
적막의 포로가 되는 것
궁금한 게 없이 게을러지는 것
아무 이유없이 걷는 것
햇볕이 슬어놓은 나락 냄새 맡는것
마른풀처럼 더이상 뻗지 않는 것
가끔 소낙비 흠씬 맞는 것
혼자 우는 것
울다가 잠자리처럼 임종하는 것
초록을 그리워하지 않는 것
<간절하게 참 철없이> 2008년
가을의 소원 이시영
내 나이 마흔 일곱
나 앞으로 무슨 큰 일을 할 것 같지도 않고
(진즉 그것을 알았어야지!)
틈나면 (실업자라면 더욱 좋고)
남원에서 곡성 거쳐 구례 가는 섬진강 길을
머리 위의 굵은 밀잠자리떼 동무 삼아 터덜터덜 걷다가
거기 압록 지나 강변횟집에 들러 아직도 곰의 손발을 지닌
곰금주의 두툼한 어깨를 툭 치며
맑디 맑은 공기 속에서 소처럼 한번 씨익 웃어보는 일!
오스트리아 할슈타트
가을의 시 - 연화리 시편26 곽재구
오후 내내
나룻배를 타고
강기슭을 따라 내려갔습니다
당신이 너무 좋아하는 칡꽃 송이들이
푸른 강기슭을 따라 한없이 피어 있었습니다
하늘이 젖은 꿈처럼 수면 위에 잠기고
수면 위에 내려온 칡꽃들이
수심 한가운데서
부끄러운 옷을 벗었습니다
바람이 불고
바람이 불어가고
지천으로 흩날리는 꽃향기 속에서
내 작은 나룻배는
그만 길을 잃고 맙니다
< 꽃보다 먼저 마음을 주었네> 열림원. 1999년
가을의 시 김현승
넓이와 높이보다
내게 깊이를 주소서
나의 눈물에 해당하는...
산비탈과
먼 집들에 불을 피우시고
가까운 곳에서 나를 배회하게 하소서
나의 공허를 위하여
오늘은 저 황금빛 열매들마저 그 자리를
떠나게 하소서
당신께서 내게 약속하신 시간이 이르렀습니다
지금은 기적汽笛들을 해가 지는 먼 곳으로 따라 보내소서
지금은 비둘기 대신 저 공중으로 산까마귀들을
바람에 날리소서
많은 진리들 가운데 위대한 공허를 선택하여
나로 하여금 그 뜻을 알게 하소서
이제 많은 사람들이 새 술을 빚어
깊은 지하실에 묻을 시간이 오면
나는 저녁 종소리와 같이 호올로 물러가
내가 사랑하는 마른 풀의 향기를 마실 것입니다
가을의 편지 황동규
우리는 정신없이 이어 살았다
생활의 등과 가슴을 수돗물에 풀고
버스에 기어오르고, 종점에 가면
어느덧 열매 거둔 과목의 폭이 지워지고
미물들의 울음 소리 들린다
잎 지는 나무의 품에 다가가서
손을 들어 없는 잎을 어루만진다
갈 것은 가는구나
가만히 있는 것도 가는구나
마음의 앙금도 가는구나
면도를 하고 약속 시간에 대고
막차를 타고 밤늦게 돌아온다
밤 세수를 하고 거울 속에서
부서진 얼굴을 만지다 웃는다
한번은 문빗장을 열어놓고 자볼까?
가을의 향기 김현승
남쪽에선
과수원의 임금林檎이 익는 냄새
서쪽에선 노을이 타는 내음 ...
산 위에 마른 풀 향기,
들가엔 장미들이 시드는 향기 ...
당신에겐 떠나는 향기,
내게는 눈물과 같은 술의 향기
모든 육체는 가고 말아도
풍성한 향기의 이름으로 남는
傷하고 아름다운 것들이여
높고 깊은 하늘과 같은 것들이
가을 원수 같은 정현종
가을이구나! 빌어먹을 가을
우리의 정신을 고문하는
우리를 무한 쓸쓸함으로 고문하는
가을, 원수 같은.
나는 이를 깨물며
정신을 깨물며, 감각을 깨물며
너에게 살의를 느낀다
가을이여, 원수 같은
가을이 가는구나 김용택
이렇게 가을이 가는구나
아름다운 시 한편도
강가에 나가 기다릴 사랑도 없이
가랑잎에 가을빛같이
정말 가을이 가는구나
조금 더
가면
눈이 오리
먼 산에 기댄
그대 마음에
눈은 오리
산은 그려지리
가을이래요 박목월
여름도 지나가고 가을이래요
하늘 높고 물 맑은 가을이래요
울타리 수숫대를 살랑 흔드는
바람조차 쓸쓸한 가을이래요
단풍잎을 우수수 떨어뜨리고
바람은 가을을 싣고 온대요
밤이 되면 고운 달빛 머리에 이고
기러기도 춤추며 찾아온대요
가을이 서럽지 않게 김광섭
하늘에서 하루의 빛을 거두어도
가는 길에 쳐다볼 별이 있으니
떨어지는 잎사귀 아래 묻히기 전에
그대를 찾아 그대 내 사람이리라
긴 시간이 아니어도 한 세상이니
그대 손길이면 내 가슴을 만져
생명의 울림을 새롭게 하리라
내게 그 손을 빌리라 영원히 주라
홀로 한쪽 가슴에 그대를 지니고
한쪽 비인 가슴을 거울 삼으리니
패물 같은 사랑들이 지나간 상처에
입술을 대이라 가을이 서럽지 않게 ...
가을이 아름다운 건 이해인
구절초, 마타리,
쑥부쟁이꽃으로
피었기 때문이다
그리운 이름이 그리운 얼굴이
봄 여름 헤매던 연서들이
가난한 가슴에 닿아
열매로 익어갈 때
몇 몇은 하마 낙엽이 되었으리라
온종일 망설이던 수화기를 들면
긴 신호음으로 달려온 그대를
보내듯 끊었던 애잔함
뒹구는 낙엽이여
아, 가슴의 현이란 현 모두 열어
귀뚜리의 선율로 울어도 좋을
가을이 진정 아름다은 건
눈물 가득 고여오는
그대가 있기 때문이라
가을이 왔다 오규원
대문을 열고 들어오지 않고 담장을 넘어
현관 앞까지 가을이 왔다
대문 옆의 황매화를 지나
비비추를 지나 돌단풍을 지나
거실 앞 타일 바닥 위까지 가을이 왔다
우리 집 강아지의 오른 쪽 귀와
왼쪽 귀 사이로 왔다
창 앞까지 왔다
매미 소리와 매미 소리 사이로
돌과 돌 사이로 왔다
우편함에서 한동안 머물다가 왔다
친구의 엽서 속에 들어 있다가
내 손바닥 위에까지 가을이 왔다
가을 저녁 김현승
긴 돌담 밑에
땅거미 지는 아스팔트 위에
그림자로 그리는 무거운 가을 저녁
짙은 크레파스의 가을 저녁
기적은 서울의 가장자리에서
멀리 기러기같이 울고
겹친 공휴일을 반기며
먼 곳 고향들을 찾아 가는
오랜 풍속의 가을 저녁
사는 것은 곧 즐거움인 가을 저녁
눈들은 보름달을 보듯 맑아 가고
말들은 꽃잎보다 무거운 열매를 다는
호올로 포키트에 손을 넣고 걸어가도
외로움조차 속내의처럼 따뜻해 오는
가을 저녁
술에 절반
무등차에 절반
취하여 달을 안고
돌아가는 가을 저녁 ㅡ
흔들리는 뻐스 안에서
그러나 가을은 여름보다 무겁다!
시간의 잎새들이 떨어지는
내 어깨의 제목 위에선 ....
가을 ㅡ 세잔느
가을저녁 이동순(1950 - ) 김천
오늘은 비가 오고
바람이 불었습니다
길에 떨어지는 나뭇잎들이
우수수 몰려다녔습니다
그대에게 전화를 걸어도
신호만 갑니다
이런 날 저녁에
그대는 어디서 무얼하고 계신지요
혹시 자신을 잃고
바람찬 길거리를 터벅터벅
지향없이 걸어가고 계신 것은 아닌지요
이 며칠 사이
유난히 수척해진
그대가 걱정스럽습니다
스산한 가을저녁이 아무리 쓸쓸해도
이런 스산함 쯤이야
아랑곳하지 않는
그대를 믿습니다
그대의 꿋꿋함을
나는 믿습니다
가을저녁에 소월
물은 희고 길구나, 하늘보다도
구름은 붉구나, 해보다도.
서럽다, 높아가는 긴 들 끝에
나는 떠돌며 울며 생각한다, 그대를
그늘 깊어 오르는 발 앞으로
끝없이 나아가는 길은 앞으로
키 높은 나무 아래로, 물마을은
성깃한 가지가지 새로 떠오른다
그 누가 온다고 한 언약도 없건마는!
기다려 볼 사람도 없건마는!
나는 오히려 못물가를 싸고 떠돈다
그 못물로는 놀이 잦을 때
가을 저녁의 시 김춘수
누가 죽어가나 보다
차마 다 감을 수 없다는
반만 뜬 채
이 저녁
누가 죽어가는가보다
살을 저미는 이 세상 외롬 속에서
물같이 흘러간 그나날 속에서
오직 한 사람의 이름을 부르면서
애터지게 부르면서 살아온
그 누가 죽어가는가보다
풀과 나무 그리고 산과 언덕
온누리 위에 스며 번진
가을의 저 슬픈 눈을 보아라
정녕코 오늘 저녁은
비길 수 없는 정한 목숨이 하나
어디로 물같이 흘거가 버리는가보다
가을 지붕 권태응
사다리를 타고서 한층 두층
언니 따라 지붕에 올라갑니다
박덩이 뒹굴대는 한옆에다
빨강 고추 흰 박고지 널어 놓아요
집집마다 지붕에도 울긋불긋
여기저기 그림같이 아름다워요
내려갈 줄 모르고 나는 자꾸만
멀리 멀리 사방 경치 바라봅니다
가을볕 박노해
가을볕이 너무 좋아
고추를 따서 말린다
흙마당에 널어놓은 빨간 고추는
물기를 여의며 투명한 속을 비추고
높푸른 하늘에 내걸린 빨래가
바람에 몸 흔들어 눈 부시다
가을볕이 너무 좋아
가만히 나를 말린다
내 슬픔을
상처난 내 욕망을
투명하게 드러나는
살아온 날들을
가을 통화 문인수
반갑게 전화를 받았습니다
잘 못 건 이의 목소리가 저 어느 별이었는지
갈색 전화기
캄캄하게 엎드린
이 섬엔
돌아올 사람 없습니다 어머니
제 전화를 오래 받으시겠습니까
가을편지 이성선
잎이 떨어지고 있습니다
원고지 처럼 하늘이
한 칸씩 비워가고 있습니다
그 빈곳에 맑은 영혼의 잉크물로
편지를 써서 당신에게 보냅니다
사랑함으로 오히려
아무런 말 못하고 돌려보낸 어제
다시 이르려해도
그르칠까 차마 또 말 못한 오늘
가슴에 고인 말을
이 깊은 시간
한 칸씩 비어가는 하늘 백지에 적어
당신에게 전해달라
나무에게 줍니다
가을하늘 유종인
하늘이 더 깊어진 것이 아니다
눈앞을 많이 치운 탓이다
밥그릇처럼 뒤집어도
다 쏟아지지 않는 저 짙푸른 늪같이
떨어지는 곳이 모두 바닥은 아니다
열린
바닥이 끝없이 새떼들을 솟아오르게 한다
티 없다는 말, 해맑다는 말!
가을엔 어쩔 수 없다는 말, 끝 모를 바닥이라는 말!
바닥을 친다는 것 고통을 저렇게 높이 올려놓고
바닥을 친다는 것
그래서 살찌고 자란다는 것!
당신이 내게 올 수도 있다는 것
변명은 더 이상 깊어지지 않는다는 것!
탄자니아 킬리만자로
가을하늘1 정완영
전선 위에 앉아 있는 제비들이 날아갑니다
가을 하늘 푸른 건반을 두드리며 날아갑니다
하늘엔 음악이 흐르고, 흰 구름이 흘러갑니다
가을 하늘2 정완영
요즘 하늘빛은 하루 한 길씩 높아가요
저러다 넘칠 것 같아요 무너질 것 같아요
구름도 따라가다가 지쳐 눕고 말아요
부산 광안대교
가을 해거름 들길에 섰습니다 김용택
사랑의 온기가 더욱 더 그리워지는
가을 해거름 들길에 섰습니다
먼 들 끝으로 해가
눈부시게 가고
산 그늘도 묻히면
길가에 풀꽃처럼 떠오르는
그대 얼굴이
어둠을 하얗게 가릅니다
내 안에 그대처럼
꽃들은 쉼없이 살아나고
내 밖의 그대처럼
풀벌레들은
세상의 산을 일으키며 웁니다
한 계절의 모퉁이에
그대 다정하게 서 계시어
한없이 걷고 싶고
그리고 마침내 그대 앞에
하얀 풀꽃
한 송이로 서고 싶어요
가을 햇볕 고운기
늦은 오후의 가을 햇볕은 오래 흘러온 강물을 깊게 만들다
늦은 오후의 가을 햇볕은 여고 2학년 저 종종걸음 치는 발걸음을
붉게 만들다, 묽그스레 달아오른 얼굴은
생살 같은 가슴에서 우러나오다
그리하여 늦은 오후의 가을 햇볕은
멀어지려 해도 멀어질 수 없는 우리들의 손을 붙잡게 하고
끝내 사랑한다 한마디로
옹송그린 세월의 어느 밑바닥을 걷게 한다
귀2 문태준
가을 풀밭에 앉아 있었네
가을 풀벌레는
무릎 주름에서 우네
걸어가며 울던
나의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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