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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의 향기/♣ 시인뜨락

한 평생 변함이 없는 사랑―시인 천상병과 아내 목순옥

by kimeunjoo 2013. 10. 4.

 

 

 

 

한 평생 변함이 없는 사랑

 

―시인 천상병과 아내 목순옥

 

 

 

 

천상병(千祥柄, 1930~1993)

 

 

천상병은 흔히 기인으로 불리었다. 1952년 『문예』에 시 추천이 완료된 후 “시인이면 그만이지 학력이 무슨 소용이냐”며 서울대 상대 4학년 2학기 등록을 하지 않고 그만둔 것부터가 기이한 행동이었다. 천상의 기쁨과 지상의 아픔을 노래한 시인 천상병이 술독에 빠진 것은 50년대 초반이다. 문인들과 어울려 늘 술에 취해 살았지만, 1967년 동백림사건으로 체포되어 고문당하기 이전까지 그는 평필(評筆)을 휘두른 문학평론가이기도 했다.

 

 

술로 인한 웃지 못할 일화 중의 하나. 소설가 모씨의 안방에 있던 향수병을 양주병으로 알고 마셔 한동안 입에서 향수 냄새를 풍기며 다닌 것도 유명하지만 박재삼 시인이 살던 단칸방에서의 방뇨사건이 압권이다. 어느 날 대취한 박재삼과 천상병 두 시인은 어깨동무를 하고 박재삼의 집으로 간다. 재삼은 부인과 아이들을 한쪽 벽으로 밀치고 잠이 들었다. 부부가 소나기 오는 소리에 잠을 깨보니 천상병이 방에다 엄청난 양의 소변을 보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고선 다시 드러누워 태평스럽게 잠을 자는 것이 아닌가. 박재삼은 그 사건 후 몇 차례 이사를 했지만 부인과의 약속 때문에 천상병에게는 집을 가르쳐주지 않았다고 한다.

 

 

 

천상병 시인과 목순옥 여사

 

 

천상병. 그는 수많은 일화를 남긴 기인이었고 뛰어난 시인이었다. 시를 즐겨 읽지 않는 사람일지라도 시인 천상병의 이름은 한 번쯤 들어봤을 것이다. 또한 인사동에 가본 사람이라면 ‘귀천’이라는 이름의 찻집을 보았을 것이다. 천상병 시인의 시 제목을 딴 찻집에는 시인이 살아 있을 때나 작고한 지 많은 시간이 지난 지금이나 시인의 아내 목순옥 여사가 변함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서울에서 매일 수십 쌍이 결혼식을 올리지만 그날의 결혼식만큼 큰 박수가 울려퍼진 적이 없었다고 한다. 두 사람이 결혼을 한 것은 1972년 5월 14일이었다. 마흔세 살 노총각과 서른여섯 살 노처녀가 결혼했으니 그 당시로서는 드문 일임에 틀림없었다. 하지만 장안의 화제가 되었던 이유는 그 결혼이 너무나 값진 사랑의 승리였기 때문이다.

 

 

시인은 1967년 6월 25일, 동백림사건에 연루되어 중앙정보부 안가에 끌려가 6개월 동안 세 차례의 전기고문 등 숱한 고문을 받고 폐인이 되다시피 한다. 동백림사건이란 독일 유학생 몇 사람이 베를린에 사는 동포의 주선으로 동베를린에 구경 간 것이 빌미가 되어 엄청난 간첩단 사건으로 비화한 사건이다. 작곡가 윤이상과 화가 이응로 등 유럽 거주 예술가들을 포함하여 수많은 사람이 체포되어 고문을 당했고, 유기형에 처해졌다. 천상병 시인의 혐의는 동백림사건의 핵심 인물이자 서울대 상대의 동기동창인 강빈구가 간첩인 것을 알고서도 신고하지 않고 그를 협박하여 돈을 뜯어냈다는 말도 안 되는 것이었다. 6개월 동안 갇혀 있으면서 전기고문 등 온갖 고문을 다 당한 끝에 집행유예를 받고 풀려난 천상병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1971년이었다. 고문의 후유증과 음주생활에서 오는 영양실조로 거리에서 쓰러진 그를 발견한 사람은 경찰이었다. 자신을 시인 천상병이라 말하면서도 시를 한 줄도 못 외는 것이 경찰로서는 너무 이상했다. 대소변조차 가리지 못하는 그를 경찰은 행려병자로 간주하여 서울시립정신병원에 입원시켰다. 천상병은 넋이 반쯤 나간 상태로 병원에서 몇 달 동안 있게 된다. 민영, 성춘복, 송영택 등의 친구가 행방불명된 시인을 찾다가 포기하고 돈을 모아 유고시집을 내준 것은 유명한 일화이다. 다행히도 그 병원의 김종해 박사가 유고시집이 나왔다는 신문기사를 보고 그 천상병이 자신이 돌보는 환자임을 알고는 친구들에게 연락해주어 병실 문을 나설 수 있었다.

 

 

목순옥의 오빠 목순복은 천상병의 친구였다. 목순옥이 여고 2학년 때, 오빠의 소개로 명동의 갈채다방에서 천상병을 처음 만나게 된다. 천상병은 그때도 좀 이상한 사람이었다. 경북 상주에서 올라온 친구의 동생 앞에서 천상병은 콧구멍을 후비며 앉아 있다가 우스운 이야기가 나오면 다방이 떠나갈 듯이 웃곤 했다. 두 사람은 곧 오빠와 동생 사이가 되어 스스럼없이 지내게 된다. 그 무렵 천상병은 시인에게 대학 졸업장이 무슨 필요가 있냐며 서울대 상대를 중퇴하고 이 집 저 집을 떠돌아다니며 얻어먹고 지내고 있었다. 목순복은 친구의 재주를 아껴 시인의 술값을 수시로 갚아주곤 했다.

 

 

세월은 흘러 시인은 고문의 후유증을 술과 담배로 달래며 살아간다. 직업이 없었으므로 술값, 담뱃값 등을 주변 사람들이 대주고 있었다. 그러니 몸과 마음이 모두 황폐해져 서울시립정신병원에 1년여 동안 입원까지 하게 되었던 것이다. 목순옥은 병원에 있는 천상병을 헌신적으로 돌봐주며 병이 깊은 시인을 위해 남은 생을 바치기로 결심한다.

 

 

‘천 선생님은 내가 아니면 안 된다. 천 선생님이 편안한 마음으로 살아가시려면 내가 저분 곁에 있어야만 한다. 내가 곁에 없으면 천 선생님도 안정을 잃지만 나 역시도 저분을 등지고서 마음 편하게 살아갈 수는 없을 것 같다.’

 

 

1972년 말에 시인은 퇴원을 했고 녹음이 푸르른 5월 14일, 김동리 선생의 주례로 천상병은 목순옥을 평생의 반려자로 맞이한다. 아니, 목순옥이 천상병을 위해 평생 간호사 역할을 하리라고 결심한다.

 

 

그때부터 목순옥 여사는 어린아이의 정신연령을 갖고 사는 남편을 위해 팔과 다리의 역할을 한다. 시인이 급성 간경화증으로 춘천의료원에 입원했을 때는 5개월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춘천과 서울을 오르내리며 간병을 했다. 그때뿐만이 아니라 1993년 4월 28일에 남편과 사별할 때까지 목순옥 여사는 시 쓰는 것 외에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남편을 정성을 다하여 섬긴다. 매일 아침 세수는 물론이거니와 손발톱도 깎아주고 목욕도 시키는 등 목순옥은 아내이자 어머니의 역할까지 하며 헌신적으로 천상병을 도왔다. 또한 찻집 ‘귀천’을 운영하며 가계까지 책임져야만 했다.

 

 

이처럼 목순옥은 27년 동안 한결같이 오직 한 사람을 위해 사랑을 쏟아부었다. 천상병 시인의 중기와 후기의 시는, 자신을 지극 정성으로 돌봐준 아내가 없었더라면 결코 쓰지 못했을 것이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귀천> 전문

 

 

 

삶의 소풍을 끝내고 하늘로 올라가 삶이 아름다웠다고 말하는, 심금을 울리는 천상병의 시는 목순옥의 이타적인 사랑에 대한 아름다운 화답가(和答歌)이다.

 

 

내용출처:함시복수초

 

 

 

 

 

다시없을 순수 영혼 나의 남편 천상병 - 목순옥 (1935~2010)

 

 

 

나의 남편 천상병 시인은 한마디로 남편이라기 보다 늘 일곱 살짜리 같다는 별명을 붙일 만큼 아기 같은 심성을 가지 남편이다. 때로는 깔깔 웃다가 마음에 안 들면 "문디 가시나"(본인은 애칭이라 함)라고 말을 뱉곤 했다.

 

 

남편과의 인연은 고등학교 2학년 때 오빠를 따라 서울에 왔다가 명동 '갈채다방'에서 그와 처음 인사를 나눈 것으로 시작됐다. 그 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 살게 되면서 '갈채다방'에 더욱 자주 들르게 됐다. 그때 많은 문인들과 만나게 되었다. 서정주 선생님을 비롯해서 김동리·손소회·박기원·황금찬·박재삼·이근배 선생님 등 많은 분들이 계셨다. 오빠는 '금문다방' '은성다방'등 여러 곳을 나를 데리고 다녔다. 오빠 친구들이 동생처럼 아껴주시고 귀여워해주셨기에 천상병 시인과도 가깝게 지낼 수 있었다. 오빠 친구들과 함께 영화도, 연극도,대폿집도, 자연스럽게 다녔다. 그때 나의 눈에는, 많은 문인들의 모습이 순수 그 자체처럼 보였다.

 

 

욕심 없이 살아가는 그 모습이 왜 그렇게 좋았는지 돌이켜 생각해본다. 내가 그 시절로 돌아간다면 다시 가난하고 고생스러운 삶을 택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도 생긴다. 그러나 긴 터널을 빠져나왔다는 안도감으로, 잘 견디어낸 나 자신에 감사하고 싶다.

 

 

천상병 시인이 나의 남편이 되기 전의 일이다. 1967년 동백림 사건에 연루되어 6개월 옥고를 치른 후 부산 형님 댁에 내려갔다가 7개월 만에 서울에 올라온 그는, 시립정신병원에 입원까지 하게 된다. 그의 입원 사실을 모른 채 행방불명이 되었다며 걱정하던 친구들이 여기저기 수소문해도 연락이 없자 죽었다고 생각하고, 유고시집을 만들기로 했다. 성춘복·민영·박재삼 선생들께서 흩어져 있던 그의 시들을 모았다. 민영 선생님이 원고를 정리하시고 성춘복 선생님이 돈을 마련하셔서 유고시집《새》가 나왔다. 김구용 선생님이 쓰신 <내 말이 들리는가>라는 서문은 가슴을 아프게 했다.

 

 

시집 발간 이후 천상병 시인은 시립정신병원에서 발견되었다. 그러니까《새》는 살아 있는 사람의 유고시집이 된 셈이고, 그것은 천상병 시인만이 가진 유명한 일화가 되었다. 나는 정신병원을 찾아가 그를 면회했고, 병원에서 그를 보살펴주던 김종해 박사님의 권유로 그를 퇴원시켜 2주 만에 결혼식을 올렸다. 김동리 선생님의 주례로 종로5가  동원예식장에서 식을 올렸다.

 

 

수락산 밑 초가집 문간방 하나를 얻어놓고 신혼생활을 시작했다. 아침이면 일어나 수락산 입구까지 산책하고 돌아와 아침을 먹고, 소꿉놀이하듯 그렇게 시작한 신혼생활은 상상을 초월한 생활이었다. 그 사이 또 한 번의 정신병원 입원 등 고난의 연속이었지만 꿈이라 생각하고 싶을 뿐이다.

 

 

결혼생활 20년, 참으로 소설 속의 주인공처럼 살았다. 남편을 두고 기인이라는 사람들이 있지만, 남편은 결코 기인이 아니라 순수한 삶을 살다 간 아이 같은 심성의 시인이었을 뿐이다. 아마도 그런 순수한 마음의 사람은 앞으로 다시없을 것이라고, 나 자신에게 거듭 말하곤 한다. 그를 오십년 동안 거울 안 같이 들여다 본 나이기 때문에 감히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남편이 하늘나라로 간 지 30년(13년인데 표기가 잘못된 듯 합니다. 김승규). 올해도 의정부 예술의전당에서 천상병예술제가 열린다. 앞으로 남은 내 생도 남편을 위해 쓰고 싶다. 소풍 끝내는 날 가서 보고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 월간 문학사상 2006년 4월호

 

 

 

 

시인은 자신의 시업(詩業)을 완성할 사람이 누구인지 알았을까,

 '여천사 같은' 장한 아내가 잠자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이렇게 노래했다.

 

 

 

 

잠모습 아내

 

 

 

어이없게 어이없게 깊게 짙게

영! 영! 여천사 같구나야!

시간 어이없게 이른 새벽!

8월 19일 2시 15분이니

모름지기 이러리라 짐작되지만

목순옥 아내는

다만 혼자서 아주 형편없이 조그만

찻집 귀천을 경영하면서

다달이 이십만원 안팎의 순이익(純利益)올려서

충분히 우리 부부와 동거하고 있는

어머니(사실은 장모님)와 조카

스무살짜리 귀엽기 짝없는 목영진

애기 아가씨와

합계 네사람 생활, 보장해 주고

또 다달이 약 오만원 가량

다달이 저금하니

 

 

…(중략)…

 

 

소설가인 이외수(李外秀)씨와 이름 잊은 제수씨가

퇴원 때 집에 와서

한달 동안 자기들 집에서 머물러 달라고

부부끼리 간청했지만……

다 무시하고

어머니와 영진이가 있는

의정부시 장암동으로 직귀(直歸)했습니다!

아내야 아내야 잠자는 아내야!

그렇잖니 그렇잖니.

 

 

<2003년 4월 취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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