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울 때 / 이생진
이 세상 모두 섬인 것을
천만이 모여 살아도
외로우면 섬인 것을
욕심에서
질투에서
시기에서
폭력에서
멀어지다 보면
나도 모르게 떠있는 섬
이럴 때 천만이 모여 살아도
천만이 모두 혼자인 것을
어찌 물에 뜬 솔밭만이 섬이냐
나도 외로우면 섬인 것을
고독 / 이생진
나는 떼 놓을 수 없는 고독과 함께
배에서 내리자마자
방파제에 앉아
술을 마셨다
해삼 한 토막에
소주 두 잔
이 죽일 놈의 고독은 취하지 않고
나만 등대 밑에서 코를 골았다.
취한 사람 / 이생진
취한 사람은
사랑이 보이는 사람
술에 취하건
사랑에 취하건
취한 사람은
제 세상이 보이는 사람
입으로는 이 세상
다 버렸다고 하면서도
눈으로는 이 세상
다 움켜쥔 사람
깨어나지 말아야지
술에 취한 사람은 술에서
사랑에 취한 사람은 사랑에서
깨어나지 말아야지
고백 / 이생진
이젠 잊읍시다
당신은 당신을 잊고
나는 나를 잊읍시다
당신은 내게 너무 많아서 탈
당신은 당신을 적게 하고
나는 나를 적게 합시다
당신은 너무 내게로 와서 탈
내가 너무 당신에게로 가서 탈
나는 나를 잊고
당신은 당신을 잊읍시다
다시 나만 남았다 / 이생진
다시 나만 남았다
영혼을 쫓아다니느라 땀이 흘렀다
영혼을 쫓아다니는데 옷이 찢겼다
자꾸 외로워지는 산길
염소쯤이야 하고 쫓아갔는데
염소가 간 길은 없어지고 나만 남았다
곳곳에 나만 남았다
허수아비가 된 나도 있었고
돌무덤이 된 나도 있었고
나무뿌리로 박힌 나도 있었다
그때마다 내가 불쌍해서 울었다
내가 많아도 나는 외로웠다
하늘로 가려던 나무 / 이생진
나무가 겁없이 자란다.
겁없이 자라서 하늘로 가겠다 한다.
하지만 하늘에 가서 무얼 한다
갑자기 허탈해진다.
일요일도 없는
하늘에 가서 무얼 한다
나무는
그 지점에서 방황하기 시작한다.
혼자 남았을 때 / 이생진
다 떠나고 혼자 남았을 때
사람이기보다 흙이었으면
돌이었으면
먹고 버린 귤껍대기였으면
풀되는 것만도 황송해서
오늘 하룻밤을 지내기 위해
돌틈에 낀 풀을 잡고 애원하는 꼴이
풀뿌리만도 못한 힘줄로
더듬더듬 밧줄을 찾았지만
고독엔 밧줄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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