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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의 향기/♣ 영상시

공터의 사랑 - 허수경

by kimeunjoo 2012. 9. 11.
 

 

 

 

공터의 사랑 / 허수경

 

한참 동안 그대로 있었다

썩었는가 사랑아

 

사랑은 나를 버리고 그대에게로 간다

사랑은 그대를 버리고 세월로 간다

 

잊혀진 상처의 늙은 자리는 환하다

환하고 아프다

 

환하고 아픈 자리로 가리라

앓는 꿈이 다시 세월을 얻을 때

 

공터에 뜬 무지개가

세월 속에 다시 아플 때

 

몸 얻지 못한 마음의 입술이

어느 풀잎자리를 더듬으며

말 얻지 못한 꿈을 더듬으리라

 

 

 

나는 춤추는 중 / 허수경

기쁨은 흐릿하게 오고
슬픔은 명랑하게 온다
바람의 혀가 투명한 빛 속에
산다, 산다, 산다, 할 때
나는 춤 추는 중
나 혼자 노는 날
나의 머리칼과 숨이
온 담장을 허물면서 세계에 다가왔다
나는 춤 추는 중
얼굴을 어느 낯선 들판의 어깨에 기대고
낯선 별에 유괴 당한 것처럼
나는 춤추는 중

 


 

 

꽃핀 나무 아래 / 허수경

한때 연분홍의 시절
시절을 기억하는 고약함이여

저 나무 아래 내 마음을 기댄다네
마음을 다 놓고 갔던 길은 일테면
길이 아니고 꿈이었을 터 아련함으로 연명해온
생애는 쓰리더라

나는 비애로 가는 차 그러나 나아감을 믿는 바퀴
살아온 길이 일테면 자궁 하나
어느 범박한 무덤 하나 찾는 거라면
이게 꿈 아닌가,

더러 돌아오겠다 했네 어느 해질녘엔
언덕에도 올라가고 야산에도 가고
눈 쓰린 햇살 마지막 햇살의 가시에 찔려
그게 날 피 흘리게 했겠는가
다만 쓰리게 했을 뿐

했을 뿐, 그러나 한때 연분홍의 시절
꿈 아닌 길로 가리라 했던 시절

 


<혼자 가는 먼 집>문학과지성사.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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