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려 / 김왕노
누가 가라하지 않았는데도 내게 와 내 창가에 빛나는 별이 있고
오라하지 않았는데도 들판을 건너와 내 빨래를 말리는 바람이 있고
어떤 눈치도 보내지 않았는데 나를 스쳐 저만치 핀 냉이 꽃이 있고
내가 원하지 않았는데도 푸른 풀밭을 헤쳐서 내 발아래 까지 기어온 꽃뱀이 있고
나의 내력에는 그 누군가를 위해 꽃씨를 간직한 지도 없고
솟대를 세워 이땅의 그리움을 알리지도 않았고
세상을 위해 희망을 부화시키려 품은 적도 없고
그런데 내 하루와 동행해주는 숲에서 번져오는 저 푸른 공기
절망의 웅덩이를 말리는 저 햇살 내 아버지 무덤가에 와 울어주는 뻐꾸기
들판 가장자리에서 양수기를 틀면 치솟아 오르는 힘찬 물줄기
내 고향 집 어머니를 벗한다며 대추나무에 날마다 날아와 재잘거린다는 참새
상처가 아물어 라며 차가운 세상을 덥히는 누군가의 온기
아가의 아장걸음을 위해 손뼉 치며 반기는 이웃의 환한 웃음
물꼬를 터주듯 누가 터주어 내게 대물림 되어 오는 이 뜨거운 피
밤이면 한반도 가득 피어나는 등불들 나는 그 누군가를 위해 아픔 한번 치르지 않았는데
지나가는 봄을 위해 바쁜 사람을 위해 길 한번 비껴주지 않았는데
누가 내 꿈속으로 악몽으로 번져 올까 불길을 잡아주려는 저 안간힘
허전한 곳마다 채우는 저 도란거리는 속삭임, 어둠을 갉아주는 생쥐의 작은 이빨
누가 가라하지 않았는데도 내 텃밭을 흠뻑 적셔주는 저 푸른 비
내가 오라하지 않았는데도 내게 와 서성거리다 가는 안개의 저 낮은 숨소리
빛의 사각지대에 가만히 내밀어 주는 누군가의 따뜻한 손
나는 이 곳에 난입해 멋대로 고함치고 얼룩 만드는데 누가 저물어가며 보내는
일몰의 저 아름다운 강둑, 아름다운 노을, 아름다운 귀가, 아름다운 노래
우기의 사랑 / 김왕노
돌아오고 있다
누우떼가 되어 그가 일으키는 발소리에 나뭇잎이 떤다
나도 오래 전 그가 온 것처럼 왔을 것이다
청춘의 사순절을 지내고 거친 숨소리로
악어가 도사린 강을 건너고
상처로 쩔뚝이며 건기의 도시를 지나
젖은 눈으로 사랑을 찾고
젖은 눈으로 그리워하려고 왔을 것이다
꿈속에서도 잘 떠오르지 않는 길을 더듬어 왔을 것이다
죽음의 사막 몇 개 저렇게 건너 왔을 것이다
어떤 귀소본능이 마른 그의 등짝을 후려쳤나 보다
아니면 오래 전 피로 유전된 길을 따라 그가 오나보다
밀렵꾼처럼 도사린 어둠 속으로 그가 돌아오고 있다
우기의 하늘을 밀고 밀어 돌아오고 있다
자세히 보면 벌써 몇 뼘 더 자라있는 그리움의 풀들
세상을 더듬으며 비 내리고
옛사랑이 돌아오고 있다
그가 돌아오고 있다
격렬한 사랑도 없이 사랑은 가고 / 김왕노
격렬한 사랑도 없이 사랑은 가고, 느릿느릿 갈 것 같은 사랑이 어느 새 가고, 격렬한 사랑도 아니었는데 모든 게 타버리고 혼자 뼈만 남은 사랑, 격렬한 사랑도 없이 사랑은 가고, 아물지 않는 울음이 있어, 항생제가 듣지 않는 상처가 있어, 결렬한 사랑도 없이 사랑은 가고, 퀑한 얼굴로 그물더미 같은 어둠에 얼굴 묻고 밤을 지나, 가을 마지막 날처럼 가고, 이제 혼자 남아 울어야 하는 사랑, 격렬한 사랑도 없이 사랑은 가고, 약속도 없이 가고, 이별의 예고도 없이 가고, 한밤이었던가, 아니면 한낮, 격렬한 사랑도 없이 사랑은 가고, 어떤 윤회의 약속도 없이, 격렬한 사랑도 없이 사랑은 가고, 격렬한 사랑도 없이 사랑은 가고
명사산(鳴沙山). 둔황시에서 남쪽으로 5㎞ 떨어진 곳에 있는 산. 바람이 불 때 산이 우는 소리를 내는 것 같아서 명사산이라는 명칭이 붙어졌다. / 세계일보
남자의 등 / 김왕노
남자의 등은 사막이다
철모가 나뒹굴고 탄피가 흩어지고
청춘이 유배되어와 절망의 자산어보나 꿈의 목민심서를 쓰다
모래가 된다
모래 바람으로 하늘을 뒤덮는다
먼 미지로 떠났던 것들이 한 줌 모래로 날아와 버석거린다
명사산이 밤새 울고 누가 실크로드를 따라가다
사막 가장 깊숙한 곳에 정박의 닻 내리고
안식의 밤 위해 푸른 달을 기다린다
온갖 탄생과 죽음이 모래 언덕을 이루기도 하고
때로는 거리 어느 모퉁이에 무거운 등짐처럼 내려놓기도 한다
남자의 등은 사막이다
그래서 한없이 넓고 끝이 없다
남자의 등은 사막이다
참을 수 없는 구름이 흘러와 비를 내리면
수천 수만 마리 폐어가 깨어나 미친 듯 산란한다
그러다 다시 잠들면 꿈의 와디가 흐르다 사라지고
사라진 별과 바람과 꽃이 사랑이 다시 부활을 기다린다
암각화된 기린과 사자 온갖 야생동물이 어둠에 젖어 우는
남자의 등은 사막이다
그래서 자꾸 등이 가렵다고 하는 남자들
오늘도 진정한 사랑을 얻으려는 한 여자가
끝없는 목마름으로
그 먼 먼 사막을 외롭게 낙타로 건너가고 있다
자산어보 : 정약전(다산 정약용의 형)이 흑산도로 귀향을 가서 쓴 수산물에 대한 책
와디 : 물이 없는 강.
'♧ 문학의 향기 > ♣ 영상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북항 - 안도현 (0) | 2012.06.28 |
---|---|
나의 유산은 - 장석남 (광화문 글판) (0) | 2012.06.28 |
한국인이 애송하는 디지털 영상시집 ... (0) | 2012.06.17 |
윤보영 시인의 비 詩 모음 ... (0) | 2012.06.15 |
북항 - 안도현 (0) | 2012.06.14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