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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의 향기/♣ 시인뜨락

한 잎의 여자 / 오규원. (해설 신광철)

by kimeunjoo 2012. 5. 4.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한 잎의 여자 / 오규원


나는 한 여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한 잎같이 쬐그만 여자,
그 한 잎의 여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그 한 잎의 솜털,
그 한 잎의 맑음,
그 한 잎의 영혼,
그 한 잎의 눈,
 
그리고 바람이 불면 보일 듯 보일 듯한
그 한 잎의 순결과 자유를 사랑했네.

정말로 나는 한 여자를 사랑했네.

여자만을 가진 여자,
여자 아닌 것은 아무 것도 안 가진 여자,
여자 아니면 아무 것도 아닌 여자,
 
눈물 같은 여자,
슬픔 같은 여자,
병신 같은 여자,
詩集 같은 여자,
 
그러나 누구나 영원히 가질 수 없는 여자,
그래서 불행한 여자.
그러나 영원히 나 혼자 가지는 여자,

물푸레나무 그림자 같은 슬픈 여자.

 

 

 

 

한 잎의 女子 2 
  
  
  나는 사랑했네. 한 女子를 사랑했네. 

  난장에서 삼천원 주고 바지를 사입는 女子, 

  남대문 시장에서 자주 스웨터를 사는 女子, 

  보세 가게를 찾아가 블라우스를 이천원에 사는 女子, 

   단이 터진 블라우스를 들고 속았다고 웃는 女子, 

  그 女子를 사랑했네. 

 

  순대가 가끔 먹고 싶다는 女子, 

  라면이 먹고 싶다는 女子, 

   꿀빵이 먹고 싶다는 女子, 

   한 달에 한두 번은 극장에 가고 싶다는 女子 , 

   손발이 찬 女子, 

  그 女子를 나는 사랑했네. 

  

  그리고 영혼에도 가끔 브래지어를 하는 女子. 

  가을날에는 스웨터를 자주 걸치는 女子, 

  추운 날엔 팬티스타킹을 신는 女子, 

  화가 나면 머리칼을 뎅강 자르는 女子, 

   팬티만은 백화점에서 사고 싶다는 女子, 

   쇼핑을 하면 그냥 행복하다는 女子, 

  실크 스카프가 좋다는 女子, 

  영화를 보면서 자주 우는 女子, 

  아이 하나는 꼭 낳고 싶다는 女子, 

   더러 멍청해지는 女子, 

  그 女子를 사랑했네. 

 

  그러나 가끔은 한잎 나뭇잎처럼 

  위험한 가지 끝에 서서 햇볕을 받는 女子. 

 

 

 

한 잎의 女子 3

 

내 사랑하는 女子, 지금 창밖에서 태양에 반짝이고 있네.

나는 커피를 마시며 그녀를 보네.

커피 같은 女子, 그레뉼 같은 女子,

모카골드 같은 女子,

창밖의 모든 것은 반짝이며 뒤집히네, 뒤집히며 변하네,

그 녀도 뒤집히며 엉덩이가 짝짝이가 되네.

오른쪽 엉덩이가 큰 女子,

내일이면 왼쪽 엉덩이가 그렇게 될지도 모르는 女子,

줄거리가 복잡한 女子,

그녀를 나는 사랑했네.

 

자주 책 속 그녀가 꽂아놓은 한 잎 클로버 같은 女子,

잎이 세 개이기도 하고 네 개이기도 한 女子.

 

내 사랑하는 女子, 지금 창밖에 있네.

햇빛에는 반짝이는 女子, 비에는 젖거나 우산을 펴는 女子,

바람에는 눕는 女子, 누우면 돌처럼 깜깜한 女子.

창밖의 모두는 태양 밑에서 서 있거나 앉아 있네.

 

그녀도 앉아 있네.

앉을 때는 두 다리를 하나처럼 붙이는 女子,

가랑이 사이로는 다른 우주와 우주의 별을 잘 보여주지 않는 女子,

앉으면 앉은, 서면 선 女子인 女子,

밖에 있으면 밖인, 안에 있으면 안인 女子,

그녀를 나는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한 잎처럼 쬐그만 女子,

女子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女子.  

 

 

 

 

 

속물적인 그리고 보다 문학적이고 몽환적이고 신비스러운 여자의 남자, 오규원 시인

 


남자에게 여자는 폭력입니다.

남자에게 여자는 감당할 수 없는 전폭적인 폭력이지요. 피할 수 없습니다.

무슨 말이냐고요.

여자는 때로는 신화처럼 신비스러운 모습으로 찾아오고,

때로는 술어나 형용사가 아닌 인생에서 가장 핵심인 주어로 다가오기도 합니다.

그래서 오규원 시인은 <한 잎의 여자>라는 시에 부제로 언어에 대한 정의라고 하기에는 막막한

신비스러움을 풍경처럼 매달아 놓았습니다.

 


- 언어는 추억에 걸려 있는 18세기형 모자다

- 언어는 겨울날 서울 시가를 흔들며 가는 아내도 타지 않는 전차다

- 언어는 신의 안방 문고리를 쥐고 흔드는 건방진 나의 폭력이다

 


한 번에 무슨 의미인지를 알아내기란 쉽지 않습니다.

난해한 풍경을 시의 추녀에 달아놓은 셈이지요. <한 잎의 여자>는 아주 단순한 시입니다.

내가 좋아하는 여자에 대한 나름의 정의를 내리고 그 나열이 시가 되었습니다.

단순한 나열이 어떻게 시가  되었나 신비스럽기까지 합니다.

시인은 언어가 가진 막막함의 신비성을 좋아하는 여자와 동격에 두고 있습니다.

시의 제목 밑에 단 시의 부제로 언어를 들여 여자라는 존재가 꿈을 꾸게 하고 있습니다.

아주 고도의 기법임에 틀림없습니다.

제목에서도 예사롭지 않은 것을 감지하게 되지요.

<한 잎의>라는 말은 여자와 만날 때 조금은 어색한데 시를 읽다보면 공감의 문이 열리는 것을

보게 됩니다.

가만 생각해보면 물푸레나무와 연관되어진 제목이 아닌가 생각되어지기도 합니다.

 


물푸레나무 그림자 같은 슬픈 女子. <한 잎의 여자 1>

그러나 가끔은 한 잎 나뭇잎처럼 위험한 가지 끝에 서서 햇볕을 받는 女子. <한 잎의 여자 2>  

물푸레나무 한 잎처럼 쬐그만 女子 <한 잎의 여자 3>

 


묘한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세 편의 시 모두 마지막 연마다 나무가 나옵니다.

그래서 한 잎의 여자라는 제목을 따왔을까 생각해 봅니다.

아니면 나뭇가지에 매달린 많은 잎새 중에 하나처럼 많은 사람 중에 특별하지 않은 한 사람이라는 것을

 의미하는지도 모릅니다. 시인 본인만이 알고 있을 듯합니다.

잎새라는 말에서는 독립성보다는 나무에 매달린 연약한 초록빛이 떠오릅니다.

바람에 파르라니 떨다가도 정지하는 순간 빛을 손으로 곱게 받았다가 흔들릴 때마다 떨구어 버리는

맑지만 조금은 변덕스러운 소녀 같은 느낌이지요. 

 

<한 잎의 여자>라는 시가 독립된 세 편의 시임에도 하나로 묶은 것은 독립과 연결의 이중성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시는 시인이 사랑하는 여자에 대한 느낌을 단순하게 나열하고 있습니다.

헌데 이상하게도 한 여자에 대한 정의가 반복되고 있는 것 외에는 다른 것이 보이지 않음에도

이 시는 사람을 끕니다.

 

남자의 건너편에 여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여자를 건너야 만날 수 있는 것이 남자이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모든 남자는 여자가 낳았거든요.

여자는 남자의 속을 알아도 남자는 여자의 속을 모르는 것은 그러한 이유에서인지도 모릅니다.

이 시는 감칠 맛 나고 매력 있습니다.

정의가 많다는 것은 정의가 정확하지 않다는 말과도 맥을 같이 합니다.

그만큼 이 시는 정의의 순도와는 관계가 없습니다.

정의내림의 순도가 떨어져서 도리어 아름다워질 수 있는 것은 지극히 문학적이기 때문입니다.

문학이 가진 상상력은 모호함과 중의적인 표현에서 상상력의 연기가 더 모락모락 나거든요.

그리고 이 시가 재밌으면서도 발랄한 기쁨을 선물하는 것은

 

시인이 가진 정신세계에서 길어 올린 독특한 속물성에서 찾아야 할지도 모릅니다.

 


영원히 나 혼자 가지는 女子,

그래서 불행한 女子.

 

난장에서 삼천 원 주고 바지를 사입는 女子,

남대문시장에서 자주 스웨터를 사는 女子,

보세가게를 찾아가 블라우스를 이천 원에 사는 女子,

단이 터진 블라우스를 들고 속았다고 웃는 女子,

순대가 가끔 먹고 싶다는 女子,

라면이 먹고 싶다는 女子,

꿀빵이 먹고 싶다는 女子,

한 달에 한두 번은 극장에 가고 싶다는 女子,

손발이 찬 女子,

햇빛에는 반짝이는 女子,

비에는 젖거나 우산을 펴는 女子,

앉을 때는 두 다리를 하나처럼 붙이는 女子,

 


어디에서나 만나고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여자입니다.

이런 속물성에서 마음이 움직이는 것은 저 자신도 가진 사람의 속물성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겠지요.

사람에게 속물성만한 친근감도 없거든요.

 

이런 미묘한 감정변화의 복잡거림 속에 갇혀 있는,

어쩌면 열려있는 여자를 사랑하는 것이 기쁨이 되는 것은 그 <한 잎의 여자>가 시인에게는

너무나 큰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조그만 변화에도 우주의 흔들림을 느낄 만큼 사랑하는 여자이기 때문입니다.

그 <한 잎의 여자>가 아파하면 시인은 더욱 가슴 시려하면서 아파하리라 보입니다.

그 <한 잎의 여자>가 자신을 바라보지 않으면 절망할 시인의 모습이 보입니다.

그래서 그 작은 변화의 파장에도 환희와 절망이 오고 가는 것입니다.

 

위에 적지 않은 또 다른 여자가 사람의 마음을 끕니다.

속물성과는 거리가 있는 여자가 있습니다.

보다 문학적이고 몽환적이고 신비스러운 여자지요.

 


눈물 같은 女子,

슬픔 같은 女子,

病身 같은 女子,

詩集 같은 女子,

영혼에도 가끔 브래지어를 하는 女子.

 

가끔은 한 잎 나뭇잎처럼

위험한 가지 끝에 서서 햇볕을 받는 女子.

 

가랑이 사이로는 다른 우주와 우주의 별을 잘 보여주지 않는 女子,

앉으면 앉은, 서면 선 女子인 女子,

밖에 있으면 밖인, 안에 있으면 안인 女子,

바람에는 눕는 女子, 누우면 돌처럼 깜깜한 女子.

 

물푸레나무 한 잎처럼 쬐그만 女子,

女子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女子.

 


다시 읽어 보세요. 묘한 자극이 파르르 떨게 합니다.

 정의 내려지지 않는 언어들이 숨죽인 듯 깜짝거리는 듯합니다.

가늠하기 힘든 상상력이 날개를 달고 나비처럼 가볍게 날기도 하고,

바람에 살랑 내려앉는 물푸레나무잎새 같기도 합니다.

 

정의되지 않는 것처럼 상상력을 이끌어오는 것은 드뭅니다.

남자에게 가장 먼 곳에 살고 있는 존재가 여자지요. 여자에게 여자 또한 아득한 존재지요.

좀 전에 이야기 했듯이 정의되지 않는 존재가 여자거든요.

 

남자라는 근육은 여자라는 꿈을 못내 그리워합니다.

그 그리움으로 아파하고 가지려 합니다. 가지려는 노력은 언제나 상처를 주지요.

마음에 남는 상처지요.

소유만큼 강렬한 감정도 없는데 근육질로는 가질 수 없는 것이 여자거든요.

왜냐고요,

이야기 했지요, 여자는 정의되지 않은 존재이기 때문이지요.

 

 

이런 여자를 보셨나요.

 

<영혼에도 가끔 브래지어를 하는 女子.

가끔은 한 잎 나뭇잎처럼 위험한 가지 끝에 서서 햇볕을 받는 女子>

 

참 아득하게 만드는 여자지요.

걱정스러우면서도 도발적인 여자인지도 모르지요. 또 다른 여자도 있습니다.

어떤 여자인가 보실래요.

 

<가랑이 사이로는 다른 우주와 우주의 별을 잘 보여주지 않는 女子,

앉으면 앉은, 서면 선 女子인 女子,

밖에 있으면 밖인, 안에 있으면 안인 女子>

 

더 막막해지지 않나요.

도무지 알 수 없는 여자입니다.

 


모국어의 극치로 여자를 유혹해 꿈결에 젖게 한 시인

 


시인은 자꾸 여자를 미궁으로 안내하고 있습니다.

따라가는 남자도 문제지만 꼬리 흔들며 유혹하는 정의되지 않는 <한 잎의 여자>가 먼저 문제겠지요.

누가 뭐라고 해도 가장 남자를 유혹하는 여자는 누가 뭐래도 이런 여자입니다.

여자는 남자의 끝에 있지 않습니다.

남자의 반대편에 여자는 있거든요. 그래서 남자는 여자를 갈망하지요.

 

남자가, 시인이 남자이기에 가장 좋아하는 여자는 바로 이런 여자입니다.

 


女子만을 가진 女子,

女子 아닌 것은 아무것도 안 가진 女子,

女子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女子.

물푸레나무 한 잎처럼 쬐그만 女子,

女子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女子.

 


여자는 남자가 가지고 싶어 하는 최고의 선물입니다.

수놈이 암놈을 사랑한 것이기도 하지만 근육질의 남자가 꿈꾸는 여자를 사랑한 것도 맞습니다.

현실과 환상 사이에 통로를 열어놓고 몽환의 환각을 불러오고 있습니다.

 

여자가 참 아름답고 이쁘고 곱습니다. 또한 시가 그립고 아쉽고 아픕니다.

아련하게 파고드는가 하면 보듬고 싶어지는 여자에 대한 환상을 가지게 합니다.

시인은 떠나갔지만 모국어로 이러한 꿈결에 젖게 한 시인이 더 없이 자랑스럽습니다. 

 

제가 아는 한 분은 오규원 시인을 이십대 때 열렬히 좋아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시인을 동경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고 했습니다.

이 시에 나오는 물푸레나무를 알려고 물푸레나무가 어떤 나무인지를 찾았다고 합니다.

이 시는 생기발랄하고 재기발랄합니다.

그러면서도 묘한 감칠맛을 가지고 있습니다. 감칠맛이란 음식을 먹은 뒤에까지도 혀에 감기듯이

남는 맛깔스러운 뒷맛이라고 사전에는 정의되어있습니다.

그리고 사람의 마음에 휘감기어 여운을 남기는, 사물에 담긴 묘미라고도 정의하고 있습니다.

헌데 <한 잎의 여자>가 그러한 뒷맛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 편의 시가 시인을 환상 속에 놓이게 하는 힘을 가진 시입니다.

 

한 사람으로서의 시인은 풀 같은 존재지요.

푸른 것 말고는 내놓을 만한 것이 없는 풀에게서 무엇을 바라기에는 가진 것이 없습니다.

나약하고 모자란 듯합니다.

그러함에도 때로는 사람이라는 이름에서 나는 거친 느낌이 시인이라는 사람에게 다가가면

이내 순화되어지는 것을 발견하고는 합니다.

적어도 순수함은 시인의 특질이라고 할 수 있을 지도 모릅니다.

 

오규원 시인은 떠났습니다.

떠나면서 시인은 자연화하고 싶었나봅니다.

오규원 시인이 떠나면서 제자의 손바닥에 글을 하나 적어주었다고 합니다.

음미해 보세요.

 


한적한 오후다

불타는 오후다

더 잃을 것이 없는 오후다

나는 나무 속에서 자본다

 


66세로 별세한 오규원 시인이 마지막으로 남겼다는 시의 끝 구절처럼 강화도 전등사에서 수목장으로

치러졌습니다. 20여 년간 서울예대 문예창작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수많은 제자들을 길러냈습니다.

 

시인은 중환자실로 옮겨지기 전에 제자 시인인 이 원 씨의 손바닥에 손톱으로

‘한적한 오후다’로 시작되는 4행의 짧은 글을 남겼다고 합니다.

 

시인은 생전에 자신이 저세상으로 가면 화장해서 뿌려달라고 했다고 합니다.

고인의 뜻을 기려 수목장으로 치렀습니다.

 한 시인은 그렇게 머물다 갔습니다.

<나는 나무 속에서 자본다>하면서 갔습니다.

한적한 오후이면서, 불타는 오후인 이중성의 세상을 하직하고 나무 속에서 긴 잠을 자러 갔습니다.  

 

장례식에서는 <혼자 걸어서 갔다 왔다> 시작되는  '그림자와 길'을 참석한 사람 모두 함께 읽었다고

합니다.

 

1965년 '현대문학'에 '겨울 나그네'가 추천되고

1968년 '몇 개의 현상'이 추천 완료됨으로써 등단했습니다.

시인은 시집으로<분명한 사건> <순례> <왕자가 아닌 한 아이에게>,<이 땅에 씌어지는 抒情詩> ,

<가끔은 주목받는 生이고 싶다> ,<사랑의 감옥> <길, 골목,호텔 그리고 강물소리>

<토마토는 붉다 아니 달콤하다> <새와 나무와 새똥 그리고 돌멩이> 

<오규원 시 전집』 1 ·2 등이 있으며

시선집 <한 잎의 여자>, 시론집 <현실과 극기>  <언어와 삶> 등과 <현대시작법>이 있습니다.

 

요즘 활발하게 활동하는 여러 문인들을 길러낸 것으로 유명합니다.

소설가 신경숙, 시인 양선희 함민복 장석남 박형준 시인이 있습니다.

 

시를 쓰며 평생을 살아온 사람에게는 더 이상 변할 것도 없나봅니다.

시에 젖어 살다보니 다른 것에는 젖지 않아,

그 여린 시를 가지고 병상에서 떠나는 순간까지 시에 젖어 살았나봅니다.

이 시가 말하고 싶은 내용도 그러한가 봅니다.

 

<비가 온다. 비가 와도 / 젖은 자는 다시 젖지 않는다>는 말이 경구처럼 들립니다.

시에 미리 젖어 다른 것에 젖지 않고 살다간 시인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강가에서 

그대와 나는 비를 멈출 수 없어

대신 추녀 밑에 멈추었었다

그 후 그 자리에 머물고 싶어

다시 한 번 멈추었었다


비가 온다, 비가 와도

강은 젖지 않는다 오늘도

나를 젖게 해 놓고, 내 안에서

그대 안으로 젖지 않고 옮겨 가는

시간은 우리가 떠난 뒤에는

비 사이로 혼자 들판을 가리라

 

혼자 가리라, 강물은 흘러가면서

이 여름을 언덕 위로 부채질해 보낸다

날려가다가 언덕 나무에 걸린

여름의 옷 한 자락도 잠시만 머문다

 

고기들은 강을 거슬러 올라

하늘이 닿는 지점에서 일단 멈춘다

나무, 사랑, 짐승 이런 이름 속에

얼마 쉰 뒤

스스로 그 이름이 되어 강을 떠난다


비가 온다, 비가 와도

젖은 자는 다시 젖지 않는다

 

                  

<비가 와도 젖은 자는>   

 

- 글, 신광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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