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에 관한 충고 / 임보
눈은 보기 위해 열려 있고
귀는 듣기 위해 뚫려 있다
닫힌 눈, 막힌 귀가
우리를 슬프게 한 것은 그 때문이다
발은 걷기 위해
손은 잡기 위해
울리지 않는 종은 종이 아니다
열매를 모르는 꽃은 꽃이 아니다
아, 사랑을 모르는 척하는 그대여!
잔인한 적막이여!
그것은 순결이 아니라
우주의 파산(破産)이다.
가시연꽃 / 임보
가시연은 맷방석 같은 넓은 잎을 못 위에 띄우고
그 밑에 매달려 산다
잎이 집이며, 옷이며, 방패며 또한 문이다
저 연못 속의 운수행각, 유유자적의 떠돌이
그러나 허약한 놈이라고 그를 깔봐서는 안 된다
그를 잘못 건드렸다간
잎과 줄기에 감춰둔 사나운 가시에 찔려
한 보름쯤 앓게 되리라
그가 얼마나 매운 마음을 지니고 있는가는
꽃을 피울 때 보면 안다
자신의 육신인 두터운 잎을 스스로 찢어
창으로 뚫고 올라온 저 가시투성이의 꽃대,
그 끝에 매달린 눈 시린 보라색, 등대의 불빛
누구의 길을 밝히려
굳은 성문을 열고
저리도 아프게 내다보는가
손의 언어 / 임보
주먹을 불끈 쥐면 분노
두 손을 비비면 애원
움켜잡으면 욕망
가만히 내밀면 구걸
쓰다듬으면 애무가 되지만
어깨 위로 들어 흔들면 작별
하나의 검지로 사람들은
지시, 선택, 야유, 고발을 한다
엄지를 세워
공중으로 쳐들면 으뜸
지상으로 내리꽂으면 죽임
엄지와 검지만을 둥글게 맞대면 돈
검지와 중지 사이에 엄지를 끼우면 음부
새끼손가락은 은밀한 여인
엄지는 우두머리
때로는 칼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총이 되기도 한다
아니, 귀가 닫힌 이들은
두 개의 손으로 얼마나 많은 말들을 빚어내던가.
임보 시집『눈부신 귀향』출간
임보 시인의 열네 번째 시집『눈부신 귀향』이 도서출판 '시학'에서 '한국의 서정시' 53번으로 출간되었다. 이번 시집은 양장 제본으로 된 150쪽에 80편의 작품이 4부로 나뉘어져 실려 있고 정가는 10,000원이다.
제1부 '길 없는 길', 제2부 '새들은 날개 위에 올려라', 제3부 '쓸쓸한 비결', 제4부 '세상을 밀고 가는 그늘'로 되어 있고 책 뒤에 흔히 붙이는 해설이나 평문 또는 발문은 없다.
"흔히 시는 관념을 지양해야 한다고들 한다. 그래서 관념의 사물화를 내세우기도 한다. 하지만 모든 경우 그렇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또한 그래서 좋은 것만도 아니다.
나는 시를 '영롱한 언어의 사리舍利'라고 정의한 바 있는데, 영롱히 빛나는 것은 사물만이 아니다.
관념도 농축되면 백자처럼 빛난다. 언어 자체가 관념의 그릇이므로 이를 배제하려 하기보다는 맑게 수용하는 일이 시의 몫일 것도 같다.
당신의 가슴속에 아름다운 풍경 대신 맑은 생각의 씨를 심고 싶다.
그 씨가 한 그루 수목으로 자라 그늘을 드리우게 되면 그대의 영혼이 안식을 누릴 수 있으리라.
이 작은 시편들이 부디 당신의 외로운 나그네 길에 좋은 길동무가 될 수 있기를……."
눈부신 귀향 / 임보
봄이 되면
꽃들은 용케도 제 집들을 찾아 피어난다.
보라
노란 개나리꽃은
어둠의 흙 속에서 헤매고 다니다
봄이 되면
가는 개나리 뿌리에 스며들어
언 개나리 줄기를 녹이며 타고 올라
작은 꽃눈의 창문을 찾아 열고
활짝 밖을 내다보지 않던가
분홍의 진달래꽃은 진달래 제 번지를
노란 민들레꽃은 민들레 제 번지를
해마다 찾는
제 집들을 놓친 적이 없다.
백목련은 백목련 가지에
자목련은 자목련 가지에 더러
바뀔 만도 한데 엇갈린 적이 없다.
술 취한 사람들은
한밤중에 가끔 제 집 찾기가 헷갈려
남의 집 초인종을 누르다
낭패를 당하기도 하는데
꽃들은 그런 일이 전혀 없다
연어가 먼 대양을 떠돌며 살아가다
씨를 뿌릴 때가 되면
수 만 리를 거슬러 그의 모천을 찾아가
거센 물살을 헤쳐 오르며
맑은 자갈밭을 열고 알을 낳듯이
수만 가지 나무의 영혼들도
지하의 어둠 속을 떠돌며
헤매고 다니다가도 때가 되면
제 고향 나무들을 찾아
그처럼 눈부신 회향을 한다
사람들아
저 가지마다에 얼굴 내밀고 있는
화사한 귀향들을 벌나비들이
얼마나 찬양하는지 보지 않았는가
머지않아 주렁주렁
그들의 고운 씨가 매달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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