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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의 향기/♣ 영상시

정든 세월에게 - 안도현

by kimeunjoo 2011. 3. 27.

 

 

 

 

 

정든 세월에게 / 안도현

 


홍매화 꽃망울 달기 시작하는데 싸락눈이 내렸다
나는 이제 너의 상처를 감싸주지 않을 거야
너 아픈 동안, 얼마나 고통스럽냐고
너 아프면 나도 아프다고
백지 위에다 쓰지 않을 거야
매화나무는 말 한마디 건네지 못한 채
어려우면 어려운대로
나뭇가지 속이 뜨거워져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너를 위하여 내가 흘릴 눈물이 있다고
말하지 않을 거야 쿨룩쿨룩, 기침을 하며
싸락눈이 봄날을 건너가고 있었다

 

 

갈등 / 안도현

 

바람은 불지요,

길을 열자고 같이 나섰던 동무들은

얼음장 꺼지듯 가라앉아 소식 없지요,

그대 보고 싶은 마음 언덕배기 빈 터에 쑥 돋듯 하지요,

저 연록 물오른 바람난 실버들 가지처럼

아, 정말 미쳐버릴 것 같지요,

나도 내 존재를 어쩌지 못해서요,

아래서는 안돼, 안돼 하면서

내 몸은 자꾸 꼬여 가지요

 

 

 

봄똥 / 안도현

 

봄똥, 생각하면

전라도에 눌러앉아 살고 싶어진다


봄이 당도하기 전에 봄똥, 발음하다가 보면

입술도 동그랗게 만들어주는

봄똥, 텃밭에 나가 잔설 헤치고

마른 비늘 같은 겨울을 툭툭 털어내고


솎아 먹는

봄똥, 찬물에 흔들어 씻어서는 된장에 쌈 싸서 먹는

봄똥, 입 안에 달싸하게 푸른 물이 고이는

봄똥, 봄똥으로 점심밥 푸지게 먹고 나서는


텃밭가에 쭈그리고 앉아

정말로 거시기를 덜렁덜렁거리며

한 무더기 똥을 누고 싶어진다

 

 

 

봄 소풍 /안도현

 

점심 먹을 때였네

누가 내 옆에 슬쩍, 와서 앉았네

할미꽃이었네

내가 내려다보니까

일제히 고개를 수그리네

나한테 말 한번 걸어보려 했다네

나, 햇볕 아래 앉아서 김밥을 씹었네

햇볕한테 들킨 게 무안해서

단무지도 우걱우걱 씹었네

 

 

 

그리운 여우 / 안도현

 

이렇게 눈 많이 오시는 날 밤에는

나는 방에 누에고치처럼 동그랗게 갇혀서

희고 통통한 나의 세상 바깥에 또 다른 세상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그 세상에도 눈이 이렇게 많이 오실 것인데

여우 한마리가, 말로만 듣던 그 눈도 털도 빨간 여우 한 마리가

나를 홀리려고 눈발 속을 헤치고

네 발로 어슬렁어슬렁 산골짜기를 타고 내려올 것이라 생각하고

그 산길에는 마을로 내려갈 때를 놓친 산수유 열매가 어쩌면 붉어져 있기도 했을 터인데

뒤도 안 돌아보고 여우 한마리가, 우리집 마당에까지 와서

부르르 몸 흔들어 귀털에 쌓인 눈을 털며

이 집에 사람이 있나, 없나 기웃거릴 것이라 혼자 생각하고

메주냄새가 나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사타구니 속에 두 손을 집어넣고 쪼글쪼글해진

그리하여 서늘하기도 한 불알을 한참을 주물러보는 것인데

그러면 나도 모르게 불끈 무엇이 일어서는 듯한 생기와 함께

나는 혹시나 여우 한 마리가,

배가 고파서 마을로 타박타박 힘없이 걸어내려왔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사람 소리 하나 안 나는 뒤꼍에서

두리번두리번 먹을 것이 없나 하고 살피다가

일찍 군불 지펴넣은 아랫방 아궁이가에 잠시 쭈그리고 앉았다가

산속에 두고 온 어린 것들을 생각하고는

여우 한마리가, 혹시라도 마른 시래기 걸린 소도 없는 외양간 뒷벽에

눈길을 주다가 코를 벌름거리며

그 코끝에는 김나는 이슬 방울이 묻어 있기도 할 것인데

아 글쎄 그 여우 한마리가, 아는 척도 하지 않는 사람들이 야속해서

세상을 차듯 뒷발로 땅을 더러 탁탁 쳐보기도 했을 터인데

먹을 것은 없고

눈은 지지리도 못난 삶의 머리끄덩이처럼 내리고

여우 한 마리가, 그 작은 눈을 글썽이며

그 눈 속에도 서러운 눈이 소문도 없이 내리리라 생각하고 나는

문득 몇 해 전이던가 얼음장 밑으로 빨려들어가 사라진

동무 하나가 여우가 되어 나 보고 싶어 왔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자리를 차고 일어나 방문을 열어제껴 보았던 것인데

눈 내려 쌓이는 소리 같은 발자국 소리를 내며

아아, 여우는 사라지고 -

여우가 사라진 뒤에도 눈은 내리고 또 내리는데

그 여우 한마리를 생각하며

이렇게 눈 많이 오시는 날 밤에는

내 겨드랑이에도 눈발이 내려앉는지 근질근질거리기도 하고

가슴도 한없이 짠해져서 도대체가 잠을 이룰 수가 없었던 것이다.

 

시집 『그리운 여우』;<창작과 비평사, 1997.> 중에

 

 

 

사랑, 당신을 위한 기도 / 안도현

 

한 사람을 사랑하는 일이

죄짓는 일이 되지 않도록

나로 인해 그이가 눈물짓지 않도록

상처 받지 않도록

사랑으로 하여 못견딜 그리움에

스스로 가슴 쥐어 뜯지 않도록

사랑으로 하여 내가 죽는 날에도

그 이름 진정 사랑했었노라

그 말만은 하지 말도록

묵묵한 가슴속에 영원이도록

그리하여 내 무덤가에는

소금처럼 하얀 그리움만 남도록

 

사랑으로 하여 못견딜 그리움에

스스로 가슴 쥐어 뜯지 않도록

사랑으로 하여 내가 죽는 날에도

그 이름 진정 사랑했었노라

그 말만은 하지 말도록

묵묵한 가슴속에 영원이도록

그리하여 내 무덤가에는

소금처럼 하얀 그리움만 남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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