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녀와 천사 / 문정희
- 최근의 자화상
나 요즘 창녀에 실패하고 있는 것 같다
천사이며 창녀인
눈부신 시인이 되고 싶었지만
어느 때 치마를 벗을지를 몰라
어느 벌판 혹은 어느 강줄기를 따라가야
술집과 벼락이 있는 줄을 몰라
여름 날 동안 누가 주인인지를 몰라
문 밖에서 매양 서성이고 말았다
폭풍을 먹어치우고 구름 속에
자수정 눈물을 흘리는 천사도 아니었다
별들이 내려와 어깨를 어루만지면
부드럽고 아름다운 굴절광 하나를
낳고 싶었지만
쥐라기 시대 파충류 같은 신비한 시구 하나를
허공에다 점점이 키우고 싶었지만
밤낮 짐승의 몸으로 쫓기며
진눈깨비처럼 빈 들에서 울다가
제자리에 현기증처럼 스러질 뿐이었다
젊은날 / 문정희 .
새벽별 처럼 아름다웠던 젊은날에도
내 어깨위엔
언제나 조그만 황혼이 걸려 있었다
향기로운 독버섯 냄새를 풍기며
손으로 나를 흔드는 바람이 있었다
머리칼 사이로 무수히 빠져 나가는
은비늘 같은 시간들
모든 시간이 덧 없음을
그때 벌써 알고 있었다
아! 젊음은
그 지느러미속을 헤엄치는
짧은 감탄사 였다
온몸에 감탄사가 붙어
그 나이에도 불구하고
나는 마른 잎사귀 였다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않는
광풍의 거리
꿈과 멸망이 함께 출렁이는
젊음은 한장의 플레카드 였다
그리하여
나는 어서 너와 함께
낡은 어둠이 되고 싶었다
촛불밖에 스러지는
하얀 적막이 되고 싶었다
테라스의 여자 / 문정희
마지막 화살을 쏘아버린 퀭한 눈을 하고
긴 손톱으로 담배를 피우는 여자
아무렇게나 풀어헤친 머리칼
주름 진 입술에 붉은 술을 붓는 여자
쉬운 결혼들, 그보다 더 쉬웠던 이혼들
그러나 모든 게 좋아
가끔 외롭지만 그것도 좋아
그 많은 상처와 그 많은 고백들은
무슨 꽃이라 부르는지 몰라도 좋아
덧없는 포옹, 바람처럼 사라진 심장 소리
말하자면 통속이지만
그 아픔이 모여 인생이 되지
도깨비바늘처럼 달라붙을까 봐
날렵한 농담으로 피해 가는 뒷모습들 바라보며
혼자 어깨를 들썩이며 웃는
테라스의 여자
생전 처음 만났는데
어디선가 많이도 보았던
수많은 여자
이별 이후 / 문정희
너 떠나간 지
세상의 달력으론 열흘이 되었고
내 피의 달력으론 십년 되었다
나 슬픈 것은
네가 없는데도 밤 오면 잠들어야 하고
끼니 오면 입 안 가득 밥알 떠 넣는 일이다
옛날옛날적
그 사람 되어가며
그냥 그렇게 너를 잊는 일이다
이 아픔 그대로 있으면
그래서 숨막혀 나 죽으면
원도 없으리라
그러나
나 진실로 슬픈 것은
언젠가 너와 내가 이 뜨거움
까맣게 잊는다는 일이다
춘궁 / 문정희
뭇 잡놈들의 시선을 받으며
바람에게 시집와서 살다가
부시시 입덧이 나서
쑥뿌리만 뽑아 올리는데
새는 울어쌓고
얼굴은 부었어도
산 찢어진 구멍마다
아기 나오는 소리
꽃 속에 서로 들어가려고
잡놈들 쌈하는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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