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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의 향기/♣ 영상시

세상의 등뼈 / 정끝별

by kimeunjoo 2011. 2. 18.
 

세상의 등뼈 / 정끝별

 

누군가는 내게 품을 대주고

누군가는 내게 돈을 대주고

누군가는 내게 입술을 대주고

누군가는 내게 어깨를 대주고

 

대준다는 것, 그것은

무작정 내 전부를 들이밀며

무주공산 떨고 있는 너의 가지 끝을 어루만져

더 높은 곳으로 너를 올려 준다는 것

혈혈단신 땅에 묻힌 너의 뿌리 끝을 일깨우며

배를 대고 내려앉아 너를 기다려 준다는 것

 

논에 물을 대주듯

상처에 눈물을 대주듯

끝 모를 바닥에 밑을 대주듯

한 생을 뿌리고 거두어

벌린 입에

거룩한 밥이 되어 준다는 것, 그것은

사랑한다는 말 대신

 

 

 

 

블루 블루스 / 정끝별

땅 속 저 깊은 흙구덩이에서도
검게 그을린 씨앗으로 남아
여덟 개의 꽃잎을 만들어냈다는
이천 년 만에 핀 젖빛 목련

여래나 금륜왕이 올 때까지
사람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는
히말라야 산록의 우담화
삼천 년 만에 피는 꽃

얼음 토탄이 되어서도
살아남았다는 기적의 씨앗
푸른 등꽃을 닮은 알래스카 루핀
일만 년 만에 핀 꽃

그러나
흙 속에서 얼음 속에서
싹도 피워보지 못한 채 죽어간
세상 모든 씨들
마음 속에서 죽어간
하 많은 기다림의 씨들

 

 

설렁탕과 로맨스 / 정끝별 

처음 본 남자는 창 밖의 비를 보고
처음 본 여자는 핸드폰의 메시지를 보네
남자는 비를 보며 순식간에 여자를 보고
여자는 메시지 너머 보이는 남자를 안 보네
물을 따른 남자는 물통을 밀어주고
파와 후추와 소금을 넣은 남자는 양념통을 밀어주네
마주 앉아 한 번도 마주치지 않는 허기
마주 앉아 한 번 더 마주 보는 허방
하루 만에 먹는 여자의 국물은 느려서 헐렁하고
한나절 만에 먹는 남자의 밥은 빨라서 썰렁하네
남자는 숟가락을 놓고 자리에서 일어나고
여자는 숟가락을 들고 늦도록 국물을 뜨네
깜빡 놓고 간 우산을 찾으러 온 남자는
여전한 여자를 처음처럼 한 번 더 보고
혼자 남아 숟가락을 들고 있는 여자는
가는 남자를 처음처럼 한 번도 안 보고
그렇게 한 번 본 여자의 밥값을 계산하고 사라지는 남자와
한 번도 안 본 남자의 얼굴을 계산대에서야 떠올려보는 여자가

단 한 번 보고 다시는 보지 못할 한 평생과
단 한 번도 보지 못해 영원히 보지 못할 한 평생이
추적처럼 내리네 만원의 합석 자리에
시월과 모래네와 설렁탕집에

 

 

 

추억의 다림질 / 정끝별


장롱 맨 아랫서랍을 열면
한 치쯤의 안개, 가장 벽촌에 묻혀
눈을 감으면 내 마음 숲길에
나비떼처럼 쏟아져

내친김에 반듯하게 살고 싶어
풀기없이 구겨져 손때 묻은 추억에
알콜 같은 몇 방울의 습기를 뿌려
고온의 열과 압력으로 다림질한다

태연히 감추었던 지난 시절 구름
내 날개를 적시는 빗물과 같아,

안주머니까지 뒤집어 솔질을 하면
여기저기 실밥처럼 풀어지는
여름, 그대는 앞주름 건너에
겨울, 그대는 뒷주름 너머에

기억할수록 날세워 빛나는 것들
기억할수록 몸서리쳐 접히는 것들
오랜 서랍을 뒤져
얼룩진 미련마저 다리자면

추억이여 어쩔 수 없지 않냐고
다리면 다릴수록 익숙히 접혀지는
은폐된 사랑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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