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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의 향기/♣ 영상시

쓸쓸 / 문정희

by kimeunjoo 2011. 2. 9.

 

 

 

 

 

쓸쓸 / 문정희

 

요즘 내가 즐겨 입는 옷은 쓸쓸이네

아침에 일어나 이 옷을 입으면

소름처럼 전신을 에워싸는 삭풍의 감촉

더 깊어질 수 없을 만큼 처연한 겨울 빗소리

사방을 크게 둘러보아도 내 허리를 감싸 주는 것은

오직 이것뿐이네

우적우적 혼자 밥을 먹을 때에도

식어 버린 커피를 괜히 홀짝거릴 때에도

목구멍으로 오롯이 넘어가는 쓸쓸!

손글씨로 써 보네 산이 두 개나 위로 겹쳐 있고

그 아래 구불구불 강물이 흐르는

단아한 적막강산의 구도!

길을 걸으면 마른 가지 흔들리듯 다가드는

수많은 쓸쓸을 만나네

사람들의 옷깃에 검불처럼 얹혀 있는 쓸쓸을

손으로 살며시 떼어 주기도 하네

지상에 밤이 오면 그에게 술 한 잔을 권할 때도 있네

그리고 옷을 벗고 무념(無念)의 이불 속에

알몸을 넣으면

거기 기다렸다는 듯이

와락 나를 끌어안는 뜨거운 쓸쓸

 

 

 

알몸노래 / 문정희

 

추운 겨울날에도

식지 않고 잘 도는 내 피만큼만

내가 따뜻한 사람이었으면

내 살만큼만 부드러운 사람이었으면

내 뼈만큼만 내가 곧고 단단한 사람이었으면

그러면 이제 아름다운 어른으로

저 살아있는 대지에다 겸허히 돌려 드릴 텐데

 

돌려드리기 전 한번만 꿈에도 그리운

네 피와 살과 뼈와 만나서

지지지 온 땅이 으스러지는

필생의 사랑을 하고 말텐데...

 

 

 

 

한계령을 위한 연가 / 문 정 희

 

한겨울 못 잊을 사람하고

한계령쯤을 넘다가

뜻밖의 폭설을 만나고 싶다.

뉴스는 다투어 수십 년 만의 풍요를 알리고

자동차들은 뒤뚱거리며

제 구멍들을 찾아가느라 법석이지만

한계령의 한계에 못 이긴 척 기꺼이 묶였으면.

 

오오, 눈부신 고립

사방이 온통 흰 것뿐인 동화의 나라에

발이 아니라 운명이 묶였으면.

이윽고 날이 어두워지면 풍요는

조금씩 공포로 변하고,

현실은 두려움의 색채를 드리우기 시작하지만

헬리콥터가 나타났을 때에도

나는 결코 손을 흔들지 않으리.

헬리콥터가 눈 속에 갇힌 야생조들과

짐승들을 위해 골고루 먹이를 뿌릴 때에도...

 

시퍼렇게 살아 있는 젊은 심장을 향해

까아만 포탄을 뿌려대던 헬리콥터들이

고라니나 꿩들의 일용할 양식을 위해

자비롭게 골고루 먹이를 뿌릴 때에도

나는 결코 옷자락을 보이지 않으리.

 

아름다운 한계령에 기꺼이 묶여

난생 처음 짧은 축복에 몸둘 바를 모르리.

 

 

1995년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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