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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의 향기/♣ 영상시

성(聖)고독 / 천양희

by kimeunjoo 2011. 1. 20.

 

 

 

 

성(聖)고독 / 천양희

 

고독이 날마다 나를 찾아온다

내가 그토록 고독을 사랑하사

고(苦)와 독(毒)을 밥처럼 먹고

옷처럼 입었더니

어느덧 독고인이 되었다

고독에 몸바쳐

예순여섯 번 허물이 된 내게

허전한 허공에다 낮술 마시게 하고

길게 자기 고백하는 뱃고동 소리 들려주네

때때로 나는

고동 소리를 고통 소리로 잘못 읽는다

모든 것은 손을 타면 닳게 마련인데

고독만은 그렇지가 않다 영구불변이다

세상에 좋은 고통은 없고

나쁜 고독도 없는 것인지

나는 지금 공사 중인데

고독은 자기 온몸으로 성전이 된다

 

 

 

 

불멸의 명작 / 천양희

 

누가

바다에 대해 말하라면

나는 바닥부터 말하겠네

바닥치고 올라간 물길 수직으로 치솟을 때

모래밭에 모로 누워

하늘에 밑줄 친 수평선을 보겠네

수평선을 보다

재미도 의미도 없이 산 사람 하나

소리쳐 부르겠네

부르다 지치면 나는

물결처럼 기우뚱 하겠네

 

누가 또

바다에 대해 다시 말하라면

나는 대책 없이

파도는 내 전율이라고 쓰고 말겠네

누구도 받아 쓸 수 없는 대하소설 같은 것

정말로 나는

저 활짝 펼친 눈부신 책에

견줄 만한 걸작을 본적 없노라고 쓰고야 말겠네

왔다갔다 하는 게 인생이라고

물살은 거품 물고 철썩이겠지만

철석 같이 믿을 수 있는 건 바다뿐이라고

해안선은 슬며시 일러주겠지만

마침내 나는

밀려오는 감동에 빠지고 말겠네

 

 

 

 

어처구니가 산다 / 천양희

 

나 먹자고 쌀을 씻나

우두커니 서 있다가

겨우 봄이 간다는 걸 알겠습니다

꽃 다 지니까

세상의 삼고(三苦)가

그야말로 시들시들합니다

 

나 살자고 못할 짓 했나

우두커니 서 있다가

겨우 봄이 간다는 걸 알겠습니다

잘못 다 뉘우치니까

세상의 삼독(三毒)이

그야말로 욱신욱신합니다

 

나 이렇게 살아도 되나

우두커니 서 있다가

겨우 봄이 간다는 걸 알겠습니다

욕심 다 버리니까

세상의 삼충(三蟲)이

그야말로 우글우글합니다

 

오늘밤

전갈자리별 하늘에

여름이 왔음을 알립니다

 

... 

 

 

三苦 :  

①고고(苦苦), 괴고(壞苦), 행고(行苦)의 세 가지 고통(苦痛).

고고는 고의 인연(因緣)으로 생기어서 받는 고통(苦痛),

괴고(壞苦)는 즐거운 일이 깨어짐으로 인(因)하여 생기는 고통(苦痛).

행고(行苦)는 세간(世間) 모든 현상(現象)의 변화(變化)가 끝이 없으므로 인(因)하여 받는 고통(苦痛)

 

三毒 : 

사람의 착한 마음에 해독(害毒)을 끼치는 세 가지 번뇌(煩惱), 곧 탐(貪), 진(瞋), 치(癡)

 

三蟲 : 삼지충 : 세가지 벌레. 구더기.

세 마리가 한 쌍으로서 인간의 단전 세 곳에 기생하여 살면서 인간 숙주의 감각·사고·감정의 세 가지 주요정보를 읽고 저장하며 사람의 정기를 취하며 살아간다.

삼충은 신들이 인간들에게 감염시킨 선계의 기생충으로서 스파이와 같은 역할을 한다. 모든 인간은 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이 삼충의 숙주가 되며 뱃속에 잉태한 아이들은 이 기생충의 알에 전염된다. 삼충은 일정한 때가 오면 사람이 잠든 사이 몸밖으로 나온다. 그것은 마치 혼백이 몸을 빠져나오는 것과 같다. 하늘에 오른 삼충은 숙주로 삼은 자의 그간 행적을 천제(天帝)에 고해 바치고 수집해온 증거를 내민다. 이것을 통해 천제는 사람의 잘잘못을 가려 명부에서 그 수명을 단축한다. 따라서 삼충이 하늘에 오르는 특정한 날에 잠을 자지 않으면 천수를 누릴 수 있다는 풍습을 낳게 했다.

거름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은 법인지라 이 때를 가려 잠을 자지 않기를 수 차례하고 기를 운행하여 단전을 뚫고 음식을 가리고 각종 약을 이용하면 박멸할 수 있다고 한다. 중국의 도교 신선사상에서 비롯된 것이나 우리나라 고려시대에 이 삼충을 피하기 위한 기간이 실제로 있었다고 전해진다.

 

 

 

 

 

 

 

 

 

 

뛰기를 멈추고 잠시 그 자리에서 뒤돌아본다…

 

천양희 7번째 시집 '나는 가끔 우두커니가 된다'

 

천양희 시인(68)이 새 시집 '나는 가끔 우두커니가 된다'(창비)를 냈다. 목적지만 바라보고 뛰어가기보다 우두커니 멈춰 섰을 때 비로소 눈에 들어오는 생(生)의 반짝이는 순간들을 63편의 시로 노래했다.

1965년 등단해 시(詩)의 높은 산을 쉼 없이 오르며 현대문학상·소월시문학상 등을 받은 시인은 7번째 시집을 내며 "때로는 단어 하나가 시집 전체를 이끄는데, 이번에는 '우두커니'라는 단어가 그 일을 한 듯하다"고 말했다.

'나 먹자고 쌀을 씻나/

우두커니 서 있다가/

겨우 봄이 간다는 걸 알겠습니다/

(…)/

나 살자고 못할 짓 했나/

우두커니 서 있다가/

(…)/

나 이렇게 살아도 되나/

우두커니 서 있다가/

겨우 봄이 간다는 걸 알겠습니다/

(…)'

 

(수록시 '어처구니가 산다')



 

▲ 새로 낸 시집에서 천천히 걷는 이의 눈에 비친 세상 풍경을 스케치한 천양희 시인.

/주완중 기자

 

우두커니 서는 것은 이처럼 자기 삶이 맹목으로 흐르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는 성찰이자 내 욕심으로 인해 남이 상처받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다짐이다.

천양희 시인은 20년 넘게 전국의 산(山)이란 산은 다 타고 다닌 등산애호가다.

"요즘은 무릎이 아파 산에 가지 못해요. 대신 동네 공원을 산책하다가 천천히 걷는 즐거움에 눈을 떴어요." 시인은 "평지를 걷게 되니까 비로소 숲이 아닌 나무 하나하나가 눈에 들어오더라"고 했다.

 

"그러고 보니 전에 다니던 산에 나무가 온통 빽빽하게 들어섰던 장면들이 떠올라요. 그래도 서로 부딪히지 않으며 살아가는 나무들처럼 우리도 타인을 위한 공간을 허락하며 살아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서울 수락산 아래 사는 시인은 집 근처 갈울공원을 즐겨 찾는다.

 

'물끄러미 나무들을 보고 있으면/

 나무에도 간격이 있다는 걸 알게 될 거야/

이 공원이 낙원이 아니라도/

마음 들어설 자리쯤은 될 테니/

간격 두지 말고 와서 보렴/

(…)/

세상에는 갈 수도 울 수도 없는 일이 많을 테니/

알려주마/

나무껍질 두꺼우니/

나이테 더욱 깊어질 것이다'

 

('갈울공원')


천양희 시인은 '말놀이(pun)'를 즐긴다. 평단(評壇)은 그녀가 언어유희의 경쾌함에 기대어 자신을 짓누르는 삶의 무게를 견디고자 했고, 그런 점에서 말놀이는 묵직한 고백이라고 해석했다. 이번 시집에서도 시인은 언어유희를 반복하지만, 그것은 생의 고통을 잊게 하는 마취제가 아니라 육지로 몰려오는 파도처럼 활달하게 삶의 에너지를 표출한다.

 

'왔다갔다 하는 게 인생이라고/

물살은 거품물고 철썩이겠지만/

철석같이 믿을 수 있는 건 바다뿐이라고/

 

'하는 시 '불멸의 명작'에서 명작은 생의 에너지가 넘실대는 바다다.

새들이 하늘을 날려면 먼저 바닥을 차며 달려야 한다고 시인은 말한다.

 

'새들은 몇번이나 바닥을 쳐야/

하늘에다 발을 옮기는 것일까/

비상은 언제나 바닥에서 태어난다/

(…)/

아직 덜 되어서/

언젠가는 더 되려는 것/

(…)/

나는 다시 배운다/

미로 없는 길 없고 미완 없는 완성도 없다'

 

('새가 있던 자리')

 

-조선일보-

 

 

 

 

시인이 매만져 다시 길을 찾은 언어들

 

칠순 천양희씨의 일곱번째 시집

삶의 비명같은 말의 유희 도처에

 

어느새 세는 나이로 칠순에 이른 시인 천양희가 일곱 번째 시집 <나는 가끔 우두커니가 된다>를 묶어 냈다. 지난 시집 <너무 많은 입> 이후 6년 만인데, 제목은 <어처구니가 산다>는 시에서 따왔다.

 

“나 먹자고 쌀을 씻나/ 우두커니 서 있다가/ 겨우 봄이 간다는 걸 알겠습니다/ 꽃 다 지니까/ 세상의 삼고(三苦)가/ 그야말로 시들시들합니다”(<어처구니가 산다> 첫 연)

 

부사 우두커니를 명사처럼 사용한 시집 제목은 비문임에 분명하지만, 언어를 매만져서 새로운 꼴로 빚어내는 일은 시인의 양보할 수 없는 특권이자 의무이기도 하다. 말장난 또는 언어유희라 할 대목들이 시집 도처에서 보이는 것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벽만이 벽이 아니라/ 때론 결벽도 벽이 되고/ 절벽 또한 벽이지요/ 절망이 철벽 같을 때/ 새벽조차 새 벽이 될 때도 없지 않지요”(<벽과 문> 부분)

 

“사과를 깎다 생각한다 사과!/ 사과 한알 깎았을 뿐인데/ 잘못한 일 생각나/ 그 사과 한번을/ 깍듯이 못했다는 생각을 한다/ 미안하다는 사과 한마디가/ 붉은 사과 한알보다 더 붉다는 것을/ 나는 왜 몰랐을까”(<왜 몰랐을까> 전반부)

 

앞의 인용시에서는 결벽과 절벽, 새벽 같은 어휘들이 벽의 다양한 종류들로 의미 전환을 이루고, 뒤의 시에서는 먹는 과일과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구하는 행위가 의도적으로 중첩되어 있다. 이런 말장난은 물론 단순한 유희 욕구의 소산일 수도 있지만, 시인이 아무런 생각 없이 말을 비틀고 꼬집을 까닭은 없을 테다.

 

조금 경우는 다르지만 시인은 “정치를 치정으로 정부를 부정으로 사설을 설사로/ 신문을 문신으로 작가를 가작으로 시집을 집시로”(<거꾸로 읽는 법>) 뒤집어 읽는 버릇을 소개하는데, 그것이 특히 “세상이 거꾸로 돌아갈 때” 도진다는 설명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말장난에는 심각한 원인이 없지 않은 것이다. “내 속에 나도 모를 비명이 있는 거”라는 시인 나름의 원인 분석을 참조한다면, 말장난은 때로 숨겨둔 비명이 정체를 감춘 채 분출하는 행위로 이해할 수 있다.

 

이처럼 틈만 나면 말장난을 일삼는 시인이지만, 특히 바다와 바닥에 관한 장난은 시집 여러 곳에서 되풀이하고 있어 주목된다.

 

“누가/ 바다에 대해 말하라면/ 나는 바닥부터 말하겠네/ 바닥 치고 올라간 물길 수직으로 치솟을 때/ 모래밭에 모로 누워/ 하늘에 밑줄 친 수평선을 보겠네”(<불멸의 명작> 앞부분)

 

“자식들에게 바치느라/ 생의 받침도 놓쳐버린/ 어머니 밤늦도록/ 편지 한 장 쓰신다/ ‘바다 보아라’/ 받아보다가 바라보다가// 바닥 없는 바다이신/ 받침 없는 바다이신”(<바다 보아라>)

 

뒤의 시에서 ‘받아’에서 ‘바다’를 거쳐 ‘바닥’으로 옮겨 가는 어휘의 연쇄적 연상이 인상적이라면, 앞의 시에서는 바다의 수평 또는 바닥이 “수직으로 치솟”는 움직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새가 있던 자리>라는 다른 시에서도 비슷한 이미지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새들은 몇 번이나 바닥을 쳐야/ 하늘에다 발을 옮기는 것일까/ 비상은 언제나 바닥에서 태어난다”(<새가 있던 자리> 부분)

 

시집 맨 앞에 나오는 <들>이 수평의 세계를 노래하는 반면, 맨 뒤에 실린 <옷깃을 여미다>가 수직적 상승 또는 초월의 욕망과 그 좌절에 바쳐진다는 사실도 흥미롭다. “올라갈 길이 없고/ 내려갈 길도 없는 들// 그래서/ 넓이를 가지는 들// 가진 것이 그것밖에 없어/ 더 넓은 들”(<들> 전문)

 

“비굴하게 굴다/ 정신차릴 때/ 옷깃을 여민다// 인파에 휩쓸려/ 하늘을 잊을 때/ 옷깃을 여민다// 마음이 헐한 몸에/ 헛것이 덤빌 때/ 옷깃을 여민다// 옷깃을 여미고도/ 우리는/ 별에 갈 수 없다”(<옷깃을 여미다> 전문)

 

그렇다면 아무리 강직하고 경건하며 단단한 마음가짐으로도 끝내 이를 수 없는 별의 세계는 역시 포기해야 할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 “하늘은 모든 것을 가져가고/ 시라는 씨앗 하나 남겨주었다”(<시(詩) 통장>), “너를 생각한 것이 나를 살렸다 시여!”(<생각은 강력한 마약>)라는 시인의 토로를 들어 보라. 그에게는 아직 시가 남아 있는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죄 없는 일” 곧 “시 쓰는 일”(‘시인의 말’)을 통해 그는 언제까지나 별에 다가갈 수 있기를 꿈꿀 것이다.

 

한겨래 / 최재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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