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값 / 정호승
어머니
아무래도 제가 지옥에 한번 다녀오겠습니다
아무리 멀어도
아침에 출근하듯이 갔다가
저녁에 퇴근하듯이 다녀오겠습니다
식사 거르지 마시고 꼭꼭 씹어서 잡수시고
외출하실 때는 가스불 꼭 잠그시고
너무 염려하지는 마세요
지옥도 사람 사는 곳이겠지요
지금이라도 밥값을 하러 지옥에 가면
비로소 제가 인간이 될 수 있을 겁니다
결빙 / 정호승
순간은 뜨겁다
꽝꽝 얼어붙은 겨울강
도도히 흐르는 강물조차
일생에 한 번은
모든 흐름을 멈추고
서로 한몸을 이루는
순간은 뜨겁다
징검다리 / 정호승
물은 흐르는 대로 흐르고
얼음은 녹는 대로 녹는데
나는 사는 대로 살지 못하고
징검다리가 되어 엎드려 있다
오늘도 물은 차고 물살은 빠르다
그대 부디 물속에 빠지지 말고
나를 딛고 일어나 힘차게 건너가라
우리가 푸른 냇가의 징검다리를
이제 몇 번이나 더 건너걸 수 있겠느냐
때로는 징검다리도 물이 되어 흐른다
징검다리도 멀리 물이 되어 흘러가
보고 싶어도
다시는 보지 못할 때가 있다
바다의 성자 / 정호승
이제 알겠다
내가 술안주로 북북 찢어먹은 북어가
명태의 미라인 것을
그동안 즐겨먹은 안동 간고등어도
바짝 마른 멸치도
고등어의 미라
멸치의 미라인 것을
돈과 사람을 구분하지 못하고
허둥지둥 살아오는 동안
멸치가 게워놓은 바다도 보지 못하고
명태가 토해놓은 파도소리도 듣지 못하고
이제 알겠다
더이상 인간에게서
성자가 나오지 않는 까닭을
그들이야말로
바다의 성자라는 것을
나의 방명록 / 정호승
나의 방명록에 기록된
인간의 이름은 이제 다 바람에 날려갔다
기역자는 기역자대로 시옷자는 시옷자대로
바람에 다 날려가
실크로드를 헤매거나 사하라 사막의
모래 언덕에 파묻혔다
어떤 애증의 이름은 파묻혀 미라가 되었거나
이젠 잊어라
이름이 무슨 사랑이더냐
눈물 없는 이름이 무슨 운명이더냐
겨울이 지나간 나의 방명록엔
이제 새들이 날아와 눈물을 흘린다
남의 허물에서 나의 허물이 보일 때
나의 방명록엔
백목련 꽃잎들이 떨어져 눈부시다
사랑을 전하는 짧은 시들 '묵직한 울림'
정호승 10번째 시집… 절제된 시어로 인생을 성찰
정호승(60) 시인의 열 번째 시집이다. 그의 바로 전 시집 <포옹>(2007)에 이은 두 글자의 간결한 제목이, 올해 환갑 나이를 맞은 그의 새로운 시적 지향을 암시한다. 수록된 시 80편 중 5편을 빼면 시 한 편의 분량이 한 쪽을 넘지 않는다. 그 중 25편은 10행 이하의 짧은 시다.
'펄펄 끓는 물에/
꽃이 핀다/
오직 한 사람을 위하여/
그 꽃을 꺾어/
꽃다발을 만든다/
사랑하는 일을/
두려워하지 않기 위하여/
펄펄 끓는 물에/
꽃은 다시 깊게/
뿌리를 내린다'
('물의 꽃')
정씨는 "침묵의 바닥에서 피어나는 꽃이 시가 아닌가 싶어 하고픈 말을 가능한 한 감춘다는 생각으로 시를 썼다"고 말했다.
그 스스로 "공동체에서 개인의 문제로 시적 관심사를 전환한 계기"로 꼽는 시집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1997) 이후, 사랑은 그의 삶과 문학에 있어 가장 큰 화두다.
그의 시는 줄곧 사랑이란 무엇인가, 사랑은 왜 귀중하고도 어려운가, 우리는 과연 누군가를 온전히 사랑할 수 있는가 등을 탐문해왔다. 때로는 각박한 세태와 인간적 원한에 가로막혀 좌절하면서도 시시포스처럼 사랑을 간구해왔던 그의 문학적 도정이 이번 시집에서 압축적으로 드러나는 느낌이다.
시인은 짐짓 성숙한 척 자신을 꾸미지 않는다. 나이 들어서도 사랑 앞에서 휘청대며 고투하는 모습을 여실하게 드러낼 따름이다. 그의 시가 지닌 호소력은 이런 솔직함에서 비롯된다. 그의 말처럼 '침묵의 바닥에서 피어나는' 짤막한 시들에서 여느 장광설이 무색한 절규가 들린다.
'나의 눈물은 뜨거운 바퀴가 되어/
차가운 겨울 거리를 굴러다닌다/
남의 불행에서 위로를 받았던 나의 불행이/
이제 남의 불행에서 위로가 되는 시간/
밤늦게 시간이 가득 든 검은 가방을 들고/
종착역에 내려도/
아무데도 전화할 데가 없다'
('충분한 불행'에서)
회한도 굳이 감추지 않는다.
'어느 벽보판 앞/
현상수배범 전단지 사진 속에/
내 얼굴이 있었다/
… /
내가 무슨 대죄를 지어/
나도 모르게 수배되고 있는지 몰라/
벽보판 앞을 평생을 서성이다가/
마침내 알았다/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 죄/
당신을 사랑하지 않고/
늙어버린 죄'
('어느 벽보판 앞에서'에서)
시인은 완전한 사랑이 가능한지 여전히 알 수 없다고 재차 고백한다. 하지만 그는 이 시집을 도돌이표로 끝맺지 않는다. "어쩌면 사랑을 향한 미완성의 도정 자체가 삶이 아니겠냐"고 넌지시 새로운 깨달음을 전한다.
'내 짐 속에는 다른 사람의 짐이 절반이다/
다른 사람의 짐을 지고 가지 않으면/
결코 내 짐마저 지고 갈 수 없다/
…/
이슬에도 햇살의 무게가 절반 이상이다/
이제 짐을 내려놓고 별을 바라본다/
지금까지 버리지 않고 지고 온 짐덩이 속에/
내 짐이 남아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내가 비틀거리며 기어이 짊어지고 온/
다른 사람의 짐만 남아 있다'
('짐'에서)
이번 시집엔 그의 첫 시집 <슬픔이 기쁨에게>에 들어있던 시 '눈사람'의 후속작으로 읽힐 만한 시 2편이 들어있어 흥미롭다. 예전 시에서 사람들의 외면을 받으며 햇살에 녹아내리던 눈사람은 아이들에 의해 운구되고('운구하다'), 눈사람의 칼을 품고 길을 떠났던 소년은 화엄사 대웅전 부처 앞에 칼을 내려놓고 '칼의 뿌리까지 썩을 때까지/ 썩은 칼의 뿌리에/ 흰 눈이 덮일 때까지/ 엎드려 운다'('폭설'에서). 칼로 상징되는 마음의 분노를 버리고자 하는 시인의 의지가 느껴지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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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단 38년 정호승 10번째 시집 ‘밥값’ 펴내
ㆍ한없이 슬프고 쓸쓸한 인생, 이를 달래주는 따스한 위로
“늙은 어머니의 잠든 얼굴 곁에서/
더듬더듬 점자시집을 읽는 밤/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분노하기보다는/
눈물로 기도하는 사람이 되기 위하여…
나를 사랑하는 방법이 오직 고통의 방법일지라도/
견딜 수 없는 고통은 허락하지 말라고/
희망에게 쓰는 편지도 이제 그만 쓰기로 한다/
사랑은 날마다 나무에 물을 주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젊은 별빛들이 내 손가락 끝에서/
환하게 점자시집을 읽는 밤”
(‘점자시집을 읽는 밤’)
정호승 시인이 10번째 시집 <밥값>(창비)을 펴냈다. 올해로 환갑, 등단 38년을 맞은 시인의 더 깊어진 내면을 담아냈다. 죽음과 인생에 대한 시인의 사유와 성찰을 담은 시집은 가슴 서늘한 쓸쓸함과 이를 달래는 따스한 위안을 함께 건넨다.
“어느 벽보판 앞/ 현상수배범 전단지 사진 속에/ 내 얼굴이 있었다… 벽보판 앞을 평생을 서성이다가/ 마침내 알았다/ 당신을 사랑하지 않은 죄/ 당신을 사랑하지 않고/ 늙어버린 죄” (‘어느 벽보판 앞에서’)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그리운 부석사’)라고 외치던 시인은 사랑하는 일이 일평생을 노력해도 어려운 일인 것을 안다. 그래서 시집 속에 그려진 시인의 자화상은 때로는 일그러지고 슬픔에 젖는다. 그러나 그것은 후회나 회한이 아니라 반성을 통해 자신을 겸허히 받아들이는 일이다. 시인은 실패와 시련을 부정하지 않고 사랑과 인간다운 삶에 대한 희망을 잃지 않는다.
<밥값> 속의 시인은 성과 속, 죽음과 삶의 가운데서 부단히 갈등하며 때로는 모순적인 모습을 보인다. 자신의 얼굴에서 슬픔과 악마를 읽어내고 좌절하지만, “식탁에 앉아 예수와 피자를 나눠먹으며/ 인생의 승리는 사랑하는 자에게 있다던/ 장기려 박사의 사랑 이야기”를 나누는 것 또한 시인이다. 그리하여 시인은 종래에 자신을 한없이 낮추고 비우며 타인과 나누는 삶의 소망을 잃지 않는다.
“내 짐 속에는 다른 사람의 짐이 절반이다/
다른 사람의 짐을 지고 가지 않으면/
결코 내 짐마저 지고 갈 수 없다…
풀잎이 이슬을 무거워하지 않는 것처럼/
나도 내 짐이 아침이슬이길 간절히 바랐으나/
이슬에도 햇살의 무게가 절반 이상이다”
(‘짐’)
<밥값>을 읽는 일은 슬프고도 쓸쓸한 일이다. 일평생 사랑하길 원했지만 그것이 어렵고 모순과 한계로 가득한 것이 인간이라는 일을 깨닫는 일이기에 그렇다. 하지만 인간이라면 누군들 그렇지 아니한가. 대중에게 사랑받는 시인이었던 정 시인이 읊조리는 겸허와 반성의 시편들은 그래서 더욱 깊은 위로와 울림을 준다.
정 시인은 “세상에는 가도 되는 길이 있고 안 가도 되는 길이 있지만 꼭 가야 하는 길이 있다. 나는 이제야 그 길이 시와 시인의 길임을 확신한다”며 “시인이 한 편의 시를 남기기 위해서는 평생이라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시집의 끝은 그래서 그에게 처음으로 시인이라는 이름을 안겨준 등단작 ‘첨성대’로 돌아간다.
“온몸에/ 함박눈을 뒤집어쓴/ 하얀 첨성대/ 첨성대 꼭대기에 홀로 서서/ 밤새도록 별을 바라보다가/ 눈사람이 된/ 나” (‘소년’)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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