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아스포라의 황혼 / 마종기
내가 원했던 일은 아니지만
안녕히 계세요.
나는 이제 가겠습니다.
산다는 것은 떠나는 것이라지만
강물도 하루 종일 떠나기만 하고
물살의 혼처럼 물새 몇 마리
내 눈에 그림자를 남겨줍니다.
한평생이라는 것이
길고 지루하기만 한 것인지.
덧없이 짧기만 한 것인지
가늠힐 수 없는 고개까지 왔습니다.
그대를 지켜만 보며, 기다리며
나는 어느 변방에서 산 것입니까.
착하고 정직한 것만이
마지막 감동이라고 굳게 믿었던
젊고 싱싱한 날들은 멀리 가고
노을이 색을 바꾸어 졸고 있습니다.
당신의 마지막 포옹만 믿겠습니다.
내 노래는 그대를 만나서야 드디어
벗은 몸의 황홀한 화음을 탔습니다.
주위의 풍경이 눈치 보며 소리 죽이고
감은 눈의 부드러움만 내게 남는 것이
이 나이 되어서야 새삼 눈물겹네요.
길목에 서 있는 바람 / 마종기
한 세월 멀리 겉돌다 돌아와 보니
너는 떠날 때 손 흔들던 그 바람이었구나
새벽 두 시도 대낮같이 밝은
쓸쓸한 북해와 노르웨이가 만나는 곳
오가는 사람도 없어 잠들어가는
작고 늙은 땅에 손금처럼 남아
기울어진 나그네 되어 서 있는 길목들
떠나버린 줄만 알았던 네가 일어나
가벼운 몸으로 손을 잡을 줄이야
바람은 흐느끼는 부활인가, 추억인가
떠돌며 힘들게 살아온 탓인지
아침이 되어서야 이슬에 젖는 바람의 잎
무모한 생애의 고장난 신호등이
나이도 잊은 채 목 쉰 노래를 부른다
두고 온 목소리가 나를 부른다
바람이 늘 흐느낀다는 마을,
이 길목에 와서야 겨우 알겠다
밤의 묵시록 / 마종기
잠에 빠져서, 잠의
긴 강을 헤엄치며 허우적거리며
벽 한 구석을 더듬어 만지다
문을 열고 얼결에
꿈의 빈 방으로 들어서는 것은
그 공간에서 그리운 사람을 만나는 것은
신기하여라, 내 잠 속에 가득한 생명.
꿈으로 들어가는 많은 길,
세상의 생사와는 관계없는 교유(交遊)가
나를 할 수 없이 숨차게 하네.
우리가 믿고 있는 진정은 어디쯤인가.
이 꿈과 저 꿈을 밤새 오가며
언제서야 당신 방을 발견할 수 있을지
그 기대 속에 오늘도 잠을 설치느니
녹슬어 가는 희망, 흔들리는 편견이여.
늘 밝고 아름다웠던 이 세상의 소문은
지상의 마지막 잠에서 당신 방을 찾는 것,
반가움의 긴 포옹으로 함께 잠길 수 있다면
죽음은 얼마나 반갑고 화려할 것인가,
우리는 또 얼마나 힘차게 뛰어 오를 것인가.
파타고니아의 양 / 마종기
거친 들판에 흐린 하늘 몇 개만 떠 있었어.
내가 사랑을 느끼지 못한다 해도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것만은 믿어보라고 했지?
그래도 굶주린 콘도르는 칼바람같이
살이 있는 양들의 눈을 빼먹고 나는
장님이 된 양을 통채로 구워 며칠째 먹었다.
어금니 두 개뿐 양들은 아예 윗니가 없다.
열 살이 넘으면 아랫니마저 차츰 닳아 없어지고
가시보다 드센 파타고니아 들풀을 먹을 수 없어
잇몸으로 피 흘리다 먹기를 포기하고 죽는 양들.
사랑이 어딘가 존재할 것이라고 믿으면 혹시,
파타고니아의 하늘은 하루쯤 환한 몸을 열어줄까?
짐승 타는 냄새로 추운 벌판은 침묵보다 살벌해지고
올려다볼 별 하나 없이 아픈 상처만 덧나고 있다.
남미의 남쪽 변경에서 만난 양들은 계속 죽기만 해서
나는 아직도 숨겨온 내 이야기를 시작하지 못했다.
* 2009년 ‘현대문학상’ 수상작이다. 이 시를 읽고 비로소 ‘파타고니아’를 찾아보았다.
그곳은 머나먼 남의 땅, 아르헨티나의 남부이며 건조한 초원이어서 목양(牧羊)이 발달한 곳이라 지시되어 있었다. 그리고 거센 바람이 지배하는 폭풍우의 대지라는 부연 설명이 붙어 있는, 듣기만 해도 척박한 곳이었다.
파타고니아는 마젤란에 의해 도륙된 이후에 역사로 편입된, 다시 말해 역사의 시작에서부터 죽음과 피냄새가 함께한다. 그 황량한 벌판에 가서 시인은 오늘날에도 진행되는 목숨의 죽음과 아픈 상처를 확인하고 있다.
아프기 위해 아픔의 땅을 찾아간 것이고, 죽음을 만나기 위해 일부러 살벌한 현장을 찾아간 셈이다. 마치 종군기자처럼 죽음의 현장에 직면하기 원하는 영혼은 사실주의적 고발정신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다. 그는 보다 깊은 이야기를 하기 원한다. 그것은 표면적으로는 ‘숨겨온 내 이야기’라는 말에서 보듯 내면의 개인사적 상처에 관한 것이면서 또한 ‘하늘’ 아래 공평한 사랑과 죽음의 인생에 관한 것이다.
굳이 자신의 상처를 들춰내지 않으면서도 그의 시선만으로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시는 암시적으로 아픔을 느끼게 한다. 경(景)을 말하면서 정(情)을 드러내는 이러한 수사적 기법은 전통적인 것이지만 현대시에서도 훌륭한 역할을 해내고 있다. 그 경(景)과 정(情) 사이에서 먼 파타고니아의 땅은 이 작품으로 인해 적게나마 우리의 눈물이 뿌려진 그런 땅이 되었다.
‘내가 원했던 일은 아니지만/ 안녕히 계세요/ 나는 이제 떠나겠습니다/ 산다는 것은 늘 떠나는 것이라지만/ 강물도 하루 종일 떠나기만 하고/ 물살의 혼처럼 물새 몇 마리/ 내 눈에 흰 그림자를 남겨줍니다.’
(‘디아스포라의 황혼’ 중)
“내가 외롭다고 허우적거렸던 젊은 날, 내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고 나는 구명대를 잡듯 시를 잡았다.”
시인 마종기(71)씨가 ‘우리는 서로 부르고 있는 것일까’(2006) 이후 4년 만에 열두 번째 시집 ‘하늘의 맨살’을 펴냈다.
1965년 한일회담 반대성명에 가담했다 고문을 당한 뒤 이듬해 도망치듯 미국으로 건너간 마씨는 이번 시집에서 귀환이라는 운동을 그리움의 에너지로 환원시킨다.
‘한평생이라는 것이/ 길고 지루하기만 한 것인지/ 덧없이 짧기만 한 것인지/ 가늠할 수 없는 고개까지 왔습니다/ 그대를 지켜만 보며, 기다리며/ 나는 어느 변방에서 산 것입니까.’(‘디아스포라의 황혼’ 중)
떠나온 곳은 있되 돌아갈 곳이 없는 상황에 처했던 마씨는 “외국에 나와 모국어와 오래 떨어져 살았던 나는, 처음부터 좋은 시인의 조건이나 틀은 가지고 있지 못했다”면서도 “비록 거친 이름일지라도 시의 영지를 넓히려 했다는 말을 듣는다면 얼마나 좋으랴”고 바란다.
1939년 일본 도쿄에서 아동문학가 마해송(1905~1966)의 아들로 태어난 마씨는 1959년 ‘해부학교실’ 등으로 ‘현대문학’에 추천을 받아 등단했다. 다음해 첫 번째 시집 ‘조용한 개선’을 내놨다.
미국에서 방사선과 의사로 근무하다 2002년 은퇴했다. 시인으로서는 특이한 이러한 경험을 따뜻하고 서정적이며 세련된 언어로 풀어내 주목받고 있다.
‘한 세월 멀리 걷돌다 돌아와 보니/ 너는 떠날 때 손 흔들던 그 바람이었구나/ …/ 바람은 흐느끼는 부활인가, 추억인가/ 떠돌며 힘들게 살아온 탓인지/ 아침이 되어서야 이슬에 젖는 바람의 잎/ 무모한 생애의 고장난 신호등이/ 나이도 잊은 채 목 쉰 노래를 부른다/ 두고 온 목소리가 나를 부른다// 바람이 늘 흐느낀다는 마을/ 이 길목에 와서야 겨우 알겠다.’(‘길목에 서 있는 바람’ 중)
마씨는 “생각해보면 이런 몰골로나마 계속 시를 써올 수 있었던 것도 복이 아닐까 싶다”고 책에 적었다. 140쪽, 7000원, 문학과지성사
한편, 지난해 등단 50주년을 넘긴 마씨는 18일 서울 대학로 설치극장 정미소에서 시인 이병률, 이희중, 정끝별, 권혁웅씨와 가수 루시드폴 등과 함께 시력 50년을 기념하는 자리도 마련한다. 루시드폴은 지난해 마씨와 서간집 ‘아주 사적인, 긴 만남’을 펴낸 바 있다.
서울=뉴시스 이재훈 기자
디아스포라 그리스어 Diaspora :
흩어진 사람들이라는 뜻으로, 팔레스타인을 떠나 온 세계에 흩어져 살면서 유대교의 규범과 생활 관습을 유지하는 유대 인을 이르던 말.
유목과는 다르며, 난민 집단 형성과는 관련되어 있다. 난민들은 새로운 땅에 계속 정착했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으나, 디아스포라란 낱말은 이와 달리 본토를 떠나 항구적으로 나라 밖에 자리잡은 집단에만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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