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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의 향기/♣ 영상시

제목없는 사랑 / 김승희

by kimeunjoo 2010. 2. 19.

           

            

           

           

           

           

                제목없는 사랑 / 김승희


                 


                죽어버릴까
                아니면 이 불행한 삶을
                계속해야하나
                해질 무렵이면
                언제나 화두처럼 떠오르는 이 질문을
                가슴에 안고
                아가를 업은 나는 골목을 서성인다

                이혼을 할까
                아니면 이 우울한 결혼을 계속할 것인가
                가령 이 질문은 언제나 그 질문과 같아서
                서울에서 가장 붐비는
                롯데 백화점앞 네거리 스타트라인 위에서
                갑자기 시동이 꺼져버린 중고차처럼
                사방에서 경음기 소리가 들려오는데
                혼자서 울고만 싶은 백치성이 있다

                절망 때문에 결혼을 하여
                그 절망을 두 배로 만들고
                허무 때문에 자식을 낳아
                그 허무를 두 배로 만들었으니
                자꾸만 약효가 안 듣는 약을
                자가처방하고 있는
                너를 무엇이라고 불러야 하나
                해질무렵이면
                약방의 진열대위에 서서
                자꾸만 이름 모를 약을 조제하고 있는
                너를
                약효를 남 먼저 시험해 보느라고
                두 눈을 감고 자꾸만 쓰디쓴 약을
                삼켜보고 있는 너를

                아가를 업고
                서성이는 골목길 안에서
                나는 너 때문에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네가 만든 영화속에
                나는 몹시 아픈 환자의 역할을 맡은
                약물 시음용 배우인 것만 같다 

                 

                 

                김승희  [달걀속의 생]  / 문학사상사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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