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이 가면 / 박인환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사랑은 가고 엣날은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밴치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서늘한 가슴에 있네
박인환(朴寅煥,) 1926년 8월 15일 - 1956년 3월 20일) 30세에 요절
1946년 시 〈거리〉를 발표하여 등단하였으며
1949년 동인그룹 '후반기'를 발족하여 활동하였다.
박인환「세월이가면」(노래가된 시)
아픈 이별이 추억으로 남기 위해서는 세월이 필요하다.
이별 바로 뒤에는 미련이지만그 미련 뒤에는 환멸이다.
그러나 다시 세월이 흘러 「사랑의 진리마저 애증의 그림자를버릴 때」 그 사람의 초롱한 눈매와
뜨거운 입술의 감촉은 다시 아련한 그리움으로 살아나 때때로 가슴을 적신다.
모더니즘의 깃발을 높이 들고 전후 폐허의 공간을 술과 낭만으로
(1926∼1956)의 「세월이 가면」은 전쟁으로 가족을 잃고,연인을 잃고,
혹은 살아 있는 사람과 이별했던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적신 화제작이었다.
을지로 입구 외환은행 본점 건물을 왼쪽으로 끼고 명동성당쪽으로
걷다보면 세월의 이끼가 낡고 앙상하게 묻어나는 3층 건물이 나타난다.
이 건물의 2층에는 놀랍게도 딜레탕트 박인환의 흔적을 기억이라도 하듯 「세월이 가면」이라는
간판을 내건 카페가 들어서 있다.
바로 이곳이 전후 명동에서 문인들의 사랑방 노릇을 하던 「명동싸롱」이었다.
박인환은 이곳에서 문우들과 어울리다가 계단을 내려와 죽음이 휩쓸고
술로 달래기 위해 맞은편 대폿집(은성: 당시 새로 생긴 술집이었다.)으로 향했다.
동석했던 가수이자 배우인 나애심에게 노래를 청하자 끝내 빼는 바람에 역시 같은 자리에 있었던
박인환의 친구 이진섭이 제안을 했다.
인환이 니가 시를 쓰면 내가 곡을 붙이겠다고,그리고 시가 나오자 이진섭은 즉석에서 샹송풍의
곡을 붙여 흥얼겨렸다.
이렇게 「세월이 가면」은 명동의 허름한 대폿집에서 누구나의
단어로 규명하지 못한 「그 눈동자와 입술」을 발굴해냈다
이 시에 대하여 강계순은 평전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아! 박인환, 문학예술사, 1983. pp. 168-171)
1956년 이른 봄 저녁 경상도집에 모여 앉은 박인환, 이진섭, 송지영, 영화배우 나애심이 술을 마시고 있었다. 술이 몇 차례 돌아가자 그들은 나애심에게 노래를 부르라고 졸랐지만 그녀는 좀체 부르지 않았다.
그 때 갑자기 박인환이 즉석에서 시를 쓰기 시작햇다.
그 시를 넘겨다 보고 있던 이진섭도 그 즉석에서 작곡을 하고 나애심은 흥얼 흥얼 콧노래로 그 곡을 부르기
시작했다.
이렇게, 깨어진 유리창과 목로주점과도 같은 초라한 술집에서 즉흥적으로 탄생한 것이 오늘까지 너무나도
유명하게 불려지고 있는 "세월이 가면"이다.
한 두 시간 후 나애심과 송지영은 돌아가고 임만섭, 이봉구 등이 합석을 했다.
모두이 술집 문 앞으로 모여드는 기상천외의 리사이틀이 열렸다.
마른 명태를 앞에다 놓고 대포잔을 기울이면서 아름다운 시를 쓰고
사람들, 그리고 그들을 지켜보며 박수를 보내는 많은 행인들―.
그것은 마치 낭만적인영화의 한 장면 같기도 했다.
박인환의 「세월이 가면」은 순식간에 명동에 퍼졌다.
마치 명동의 골목마다 스며 있는 외로움과 회상을 상징하는 듯 이곳 저곳에서 이 노래는
불리어졌다.
이 「세월이 가면」에는 전혀 알려지지 않은 애절한 이야기가 담겨져 있다.
이 시를 쓰기 전날 박인환은 십년이 넘도록 방치해 두었던
묘지에 다녀왔다.
.... 그는 인생을 정리하고 있었던 것 같다.
사랑도, 시도, 생활도 차근 차근 정리하면서
그의 가슴에 남아 있는 먼 애인의 눈동자와 입술이 나뭇잎에 덮여서 흙이 된 그의 사랑을
마지막으로 돌아보았다.......
순결한 꿈으로 부풀었던 그의 청년기에 아름다운 무지개처럼 떠서 영원히 가슴에 남아있는 것,
어떤 고통으로도 퇴색되지 않고 잇던 젊은 날의 추억은 그가 막 세상을 하직하려고 했을 때
다시 한번 그 아름다운 빛깔로 그의 가슴을 채웠으리라.
그는 마지막으로, 영원히 마지막이 될 길을 가면서 이미 오래 전에 그의 곁에서 떠나간 연인의
무덤에 작별을 고하고 은밀히 얘기하고 싶었다....
이 시의 유래
1956년 이른 봄이었습니다.
그 날도 막걸리를 파는 "경상도집"에 여러 시인, 예술가들과 술을 마시고 있다가 누군가가 가수 나애심에게
노래를 한 곡 불러보라고 하였습니다.
나애심이 마땅한 노래가 없다고 거절하자,
그 시를 받아 든 작곡가
악보가 완성되자 나애심이 노래를 불렀습니다.
뒤이어 찾아온 테너
성악가가 부르는 우렁찬 노래가 명동거리에 울려 퍼지자 사람들이 경상도집 앞으로 모여들었습니다.
한 자리에서 작곡과 노래로 이어지게 한 그 시가 바로 '세월이 가면'입니다.
그로부터 일주일 뒤인
심장마비였습니다.
그토록 좋아하던 술인 조니워커와 멋 부린다며 피울 줄도 모르면서 가지고 다니던 담배 한 갑과 더불어.
이 노래에 담긴 의미
1950년 한국전쟁은 온 나라를 잿더미로 만들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미군 폭격을 맞아 모든 산업시설이 파괴되어버렸다는 휴전선 북쪽지역은 물론이고, 서울도 중국군과 시가전을 벌이느라 만신창이가 되고
말았습니다.
서울에서도 가장 화려한 곳이라는 명동 또한 파괴를 피할 수는 없었습니다.
꽃처럼 화려한 명동이지만 전쟁이 끝나자 군용 밥그릇을 들고 밥을 빌어먹는 거지아이들과 구두닦이, 실직자들이 들끓었습니다. 그리고 시인, 화가, 예술가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전쟁통에 모든 것을 잃어버린 나라에서 그들은 오라는 데도 없고, 갈 곳도 없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명동에 모인 예술가들은 같이 차를 마시고, 막걸리를 마시며 시와 예술에 대해 토론하고 얘기했습니다.
보고 싶은 이가 있을 때도 명동으로 가면 어김없이 만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단연 돋보였습니다.
잘 생긴 얼굴, 훤칠한 키, 그리고 여름에도 정장을 즐겨 입던
양복은 외국산 고급천으로 만들어진 것이었고, 일류양복점 상표가 붙어있었습니다.
흐린 날은 박쥐우산을, 봄가을에는 우유빛 레인코트를, 겨울이 되면 러시아 사람들처럼 깃이 넓은 진회색
외투를 입고 다녔다고 합니다.
주머니가 늘 비어있는 가난뱅이였지만, 기죽거나 비굴하지 않고, 당당하였습니다.
하고 싶은 말은 언제나 거침없이 하였습니다.
'세월이 가면'을 만드는 날 밤에도 돈도 없이 무슨 술을 그리 마시냐는 주인아주머니한테
“꽃 피기 전에 갚으면 될 것 아냐!”라고 큰소리 쳤습니다.
"여름은 통속이고 거지야. 겨울이 와야 두툼한 홈스펀 양복도 입고 바바리도 걸치고 머플러도 하고 모자도 쓸 거 아냐."
그 말속에는 전쟁으로 폐허가 된 서울을, 나라를 안타까워하는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전쟁으로 부서져버린 온 나라와 가난과 절망으로 얼룩진 세상을 향한 슬픔이 담겨 있습니다.
전쟁으로 허무하게 죽은 이들과 절망한 이들에게 보내는 위로가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헐벗은 거지지만, 겨울이오면 두툼한 외투를 입는 것처럼 풍요로운 시절이 올 것이라는 기원이 담겨있습니다.
'세월이 가면'을 쓰자 경상도집 주인아주머니가,
"인환아 니 우짤라고 그런 시를 썼노?" 라고 몇 번이나 되물었다고 합니다.
쓴 까닭이 궁금한 것이 아니라 그 시 안에 담긴 의미가 서늘했던 것입니다.
내 서늘한 가슴은 전쟁으로 죽은 사람과 사라진 것들을 그리는 말이기도 하지만, 시인 자신이 곧 서늘한 가슴이 될 것이라는 예언과도 같은 말입니다.
그리고 일주일 뒤에
꽃피기 전에 외상값 갚는다는 약속도 지키지 못했습니다.
꽃피는 날이 다가오기도 전에
하필이면 가슴, 그것도 심장마비로.
3월 20일이면.... 며칠만 있으면 꽃이 필 텐데.
죽기 사흘 전은
그 날 따라 유난히 술을 많이 먹은
"누가 알아? 이걸로 절필을 하게 될지...."라는 말과 함께...
사흘 뒤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술에 취해 집으로 돌아 온
무렵 생명수를 달라는 외침을 남기고 저 세상으로 가고 말았습니다.
'세월이 가면'과 더불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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