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년회 / 목필균
후미진 골목 두 번 꺾어들면
허름한 돈암곱창집
지글대며 볶아지던 곱창에
넌 소주잔 기울이고
난 웃어주고
가끔 그렇게 안부를 묻던 우리
올해 기억 속에
너와 만남이 있었는지
말로는 잊지 않았다 하면서도
우린 잊고 있었나 보다
나라님도 어렵다는 살림살이
너무 힘겨워 잊었나 보다
12월 허리에 서서
무심했던 내가
무심했던 너를
손짓하며 부른다
둘이서
지폐 한 장이면 족한
그 집에서 일년 치 만남을
단번에 하자고
송년의 시 / 윤보영
이제 그만 훌훌 털고 보내주어야 하지만
마지막 남은 하루를 매만지며
안타까운 기억 속에 서성이고 있다
징검다리 아래 물처럼
세월은 태연하게 지나가는데
시간을 부정한 채 지난날만 되돌아보는 아쉬움
내일을 위해 모여든 어둠이 걷히고
아픔과 기쁨으로 수놓인 창살에 햇빛이 들면
사람들은 덕담을 전하면서 또 한 해를 열겠지
새해에는 멀어졌던 사람들을 다시 찾고
낯설게 다가서는 문화를 받아들이면서
올해 보다 더 부드러운 삶을 살아야 겠다
산을 옮기고 강을 막지는 못하지만
하늘의 별을 보고 가슴 여는
아름다운 감정으로 살았으면 좋겠다..
연말결산(年末決算) / 이외수
한 해가 저물고 있다
지나간 날들은 망실되고
사랑한 증거도 남지 않았다
나는 어디로 가야 하나
자폐증에 빠져 있는 겨울풍경
속으로 눈이 내린다
눈이 내리면
시간이 깊어진다
인생은 겨울밤
얼음 밑으로 소리 죽여
흐르는
강물이다
- 送 年 - / 피천득
"또 한 해가 가는구나.....!"
세월이 빨라서가 아니라 인생이 유한(有限)하여 이런 말을 하게 된다.
새색시가 김장 삼십 번만 담그면 할머니가 되는 인생.
우리가 언제까지나 살 수 있다면
시간의 흐름은 그다지 애석하게 여겨지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에 세모(歲暮)의 정은,
늙어가는 사람이 더 느끼게 된다.
남은 햇수가 적어질수록 1년은 더 빠른 것이다.
백발이 검은 머리만은 못하지만 물을 들여야 할 이유는 없다.
오히려 온아한 데가 있어 좋다.
때로는 위풍과 품위가 있기까지 하다.
젊게 보이려고 애쓰는 것이 천하고 추한 것이다.
젊어 열정에다 몸과 마음을 태우는 것과 같이 좋은 게 있으리오 마는,
애욕, 번뇌, 실망에서 해방되는 것도 적지 않은 축복이다.
기쁨과 슬픔을 많이 겪은 뒤에
맑고 침착한 눈으로 인생을 관조하는 것도 좋은 일이다.
여기에 회상이니 추억이니 하는 것을 계산에 넣으면 늙음도 괜찮다.
그리고 오래 오래 살면서
신문에 가지 가지의 신기하고 해괴한 일을 보는 것도 재미있다.
새해에는 잠을 못 자더라도 커피를 마시고
파이프 담배를 피우고
술도 마시도록 노력하겠다.
눈 오는 날, 비 오는 날, 돌아다니기 위하여 털신을 사겠다.
금년에 가려다 못 간 설악산도 가고 서귀포도 가고,
내장사 단풍도 꼭 보러 가겠다.....
-피천득님의 수필집 에서-
연말회송(年末悔頌) / 정재영(小石)
바퀴는
회전만 하고 있어서
제자리에
있는가 했는데
수레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가고자 하는 곳까지
언제 움직여 놓여져 있었다
세끼 밥만 먹고 지내며
하루 하루
시간만 보낸 줄 알았는데
돌아갈 길
저리도 까마득한 곳
멀리도 와 있다
떠나서
가야할 길도
보이지 않고 아득한데
새것도 헌것도
찢어낼 수 없는
모두가 이어진 길 위의
간이역일 뿐이다
제야除夜 / 오정방
날日이 저물었다
달月이 저물었다
해年가 다 저물었다
더는 갈 수가 없다
억지로 돌아설 수도 없다
이 밤이 새고나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거다
제야의 종소리를
가슴으로 들으면서
송구영신 하는거다
지나간 것은 늘 아쉽고
새로운 것은
언제나 기대에 부푼다
가는해 오는해 길목에서 / 경한규
또 한 해가 저물어갑니다
해마다 이맘 때면
아쉬움과 작은 안도가 톱니바퀴처럼
맞물립니다
봄볓 같은 햇살에
땅끝이 다시 파릇파릇 되살아나
겨울이 겨울답지 않다고 투덜거리다가도
가던 길 멈추고 별빛 끌어내리면
이내
없는 이들의 가슴에 스미어
참 다행이다 싶기도 합니다
12월의 플렛홈에 들어서면 유난히
숫자 관념에 예민해집니다
이별의 연인처럼 22 23 24......31
자꾸만 달력에 시선을 빼앗깁니다
한 해 한 해
냉큼 나이만 꿀꺽 삼키는 것이
못내 죄스러운 탓이겠지요
하루 하루
감사의 마음과 한 줌의 겸손만 챙겼더라도
이보다는 훨씬
어깨가 가벼웠을텐데 말입니다
오는 해에는
이웃에게 건강과 함박웃음 한 바가지만
선물할 수 있기를 기원해 봅니다
우리는 누구나
홀로 떠있는 섬과 같습니다
못난 섬
멀리 내치지 않은 모든 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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