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에 관한 시
가을 ㅡ 강은교. 김광림.김용택. 김종길. 김현승. 드라메어. 릴케.마종기.문인수.박경리.백남석
송찬호. 양주동. 유안진.윤희상. 이안.정호승.조병화.최승자. 함민복. 헤세. 흄
가을날 ㅡ 노천명. 릴케. 서거정. 손동연. 정희성
가을에 ㅡ 기형도. 김정환.서정주.오세영. 정한모.황동규
늦가을 ㅡ 김사인. 김지하.이덕무
초가을 ㅡ 김용택

가을 - 강은교
기쁨을 따라갔네
작은 오두막이었네
슬픔과 둘이 살고 있었네
슬픔이 집을 비울 때는 기쁨이 집을 지킨다고 하였네
어느 하루 찬바람 불던 날 살짝 가보았네
작은 마당에는 붉은 감 매달린 나무 한그루 서성서성
뒤에 있는 산, 날개를 펴고 있었네
산이 말했네.
어서 가보게, 그대의 집으로

가을 - 김광림
고쳐
바른
단청빛
하늘이다
경내는
쓰는 대로
보리수 잎사귀
한창이다
잎줄기에서
맺혀 나온
염주알
후두둑 떨어진다
벼랑 위에
나붓이 앉으신
참 당신
보인다

가을 - 김용택
가을입니다
해질녘 먼 들 어스름이
내 눈 안에 들어섰습니다
윗녘 아랫녘 온들녘이 모구
샛노랗게 눈물겹습니다
말로 글로 다할 수 없는
내 가슴 속의 눈물겨운 인정과
사랑의 정감들을 당신은 아시는지요
해지는 풀섶에서 우는
풀벌레들 울음소리 따라
길이 살아나고 먼 들 끝에서 살아나는
불빛을 찾았습니다
내가 가고 해가 가고
꽃이 피는 작은 흙길에서
저녁 이슬들이 내 발등을 적시는
이 아름다운 가을 서정을
당신께 드립니다

가을 - 김종길
먼 산이 한결 가까이 다가선다
사물의 명암과 윤곽이
더욱 또렷해진다
가을이다
아 내삶이 맞는
또 한 번의 가을!
허나 더욱 성글어지는 내 머리칼
더욱 엷어지는 내 그림자
해가 많이 짧아졌다

가을 -김현승(1913-1975) 광주.
봄은
가까운 땅에서
숨결과 같이 일더니
가을은
머나먼 하늘에서
차가운 물결과 같이 밀려온다
꽃잎을 이겨
살을 빚던 봄과는 달리
별을 생각으로 깎고 다듬어
가을은
내 마음의 보석을 만든다
눈동자 먼 봄이라면
입술을 다문 가을
봄은 언어 가운데서
네 노래를 고르더니
가을은 네 노래를 헤치고
내 언어의 뼈마디를
이 고요한 밤에 고른다
<김현승 시선집> 관동출판사. 1974년

가을 - 드라메어
장미 피었던 곳에 거친 바람 불고
향긋한 풀 무성했던 곳에 찬비 내리고
종달새 즐거이 지저귀던
회색빛 하늘 가파른 곳엔
구름만이 양떼되어 흐른다
너의 머리카락 있던 곳에서 황금빛 찾을 길 없고
너의 손길 있던 곳에선 따스함이 사라진지 오래구나
너의 얼굴을 바라보던 장미 덩굴 아래엔
서글픈 환상만이
너의 망령을 불러들일 뿐이다
너의 목소리 들리던 곳엔 차가운 바람만 스산하고
나의 마음 깃들었던 곳엔 방울방울 눈물이 고인다
또한 한때는 희망이 있던 내 가슴엔
이제는 항상 침묵이 있을 뿐이란다
나의 그리운 사랑아

가을 - 릴케(1875-1926)
나뭇잎이 떨어진다, 하늘나라 먼 정원이 시든 듯
저기 아득한 곳에서 떨어진다
거부하는 몸짓으로 떨어진다
그리고 밤마다 무거운 대지다
모든 별들로부터 고독 속으로 떨어진다
우리 모두가 떨어진다 여기 이 손도 떨어진다
다른 것들을 보라 떨어짐은 어디에나 있다
하지만 이 떨어짐을 한없이 부드럽게
두 손으로 받아내는 어느 한 분이 있다

리오 데 자이네루(1763-1960년까지 브라질의 수도)
가을 - 마종기
가벼워진다
바람이 가벼워진다
몸이 가벼워진다
이곳에
열매들이 무겁게 무겁게
제 무게대로 엉겨서 땅에 떨어진다
오, 이와도 같이
사랑도, 미움도, 인생도, 제 나름대로 익어서
어디로인지 사라져간다

가을 - 문인수
여러 번 붉게 큰물 지고 나서
어느 날은 차디차게 발목에 감기는
가을
하늘에다가는 달게 감홍시 하나 남겨 놓듯이
누군가는 또 한나절 땅에다가는
그러나 그랬달 덧도 없이
어느 날은 넌지시 징검다리 놓이는

가을 - 박경리
방이 아무도 없는 사거리 같다
뭣이 어떻게 빠져 나간 걸까
솜털같이 노니는 문살의 햇빛
조약돌 타고 흐르는 물소리
나는 모른다, 나는 모른다, 그러고 있다
세월 밖으로 내가 쫓겨난 걸까
창밖의 저만큼 보인다
칡넝쿨이 붕대같이 감아 올리자 나무 한 그루
같이 살자는 건지 숨통을 막자는 건지
사방에서 숭숭 바람이 스며든다
낙엽을 말아 올리는 스산한 거리
담뱃불 끄고 일어선 사내가 떠나간다
막바지의 몸부림인가
이별의 포한인가
생명은 생명을 먹어야 하는
원죄로 인한 결실이여
아아 가을은 풍요로우면서도
참혹한 계절이다 이별의 계절이다

가을 - 백남석 작사. 현제명 작곡
가을이라 가을 바람 솔솔 불어오니
푸른 잎은 붉은 치마 갈아입고서
남쪽나라 찾아가는 제비 불러모아
봄이 오면 다시 오라 부탁하노라
가을이라 가을 바람 솔솔 불어오니
밭에 익은 곡식들은 금빛이구나
추운 겨울 지낼 적에 우리 먹이려고
하나님이 내려주신 생명의 양식

가을 - 송찬호
딱! 콩꼬투리에서 튀어나간 콩알이 가슴을 스치자,
깜짝 놀란 장끼가 넌너편 숲으로 날아가 껑, 껑, 우는 서러운 가을이었다
딱! 콩꼬투리에서 튀어나간 콩알이 엉덩이를 때리자,
초경이 비친 계집애처럼 화들짝 놀란 노루가 찔끔 피 한방울 흘리며
맞은편 골짜기로 정신없이 달아나는 가을이었다
멧돼지 무리는 어제 그제 달밤에 뒹굴던 삼밭이 생각나,
외딴 콩밭쯤은 거들떠 보지도 않고 지나치는 산비알 가을이었다
내년이면 이 콩밭도 묵정밭이 된다 하였다
허리 구부정한 콩밭 주인은 이제 산등성이 동그란 백도라지 무덤이 좋다 하였다
그리고 올 소출이 황두 두말 가웃은 된다고 빙긋이 웃었다
그나저나 아직 볕이 좋아 여직 도리깨를 맞지 않은 꼬투리들이
따닥따닥 제 깍지를 열어 콩알 몇 낱을 있는 힘껏 멀리 쏘아부치는 가을이었다
콩새야, 니 여태 거기서 머하고 있노
어여 콩알 주워가지 않구
다래넝쿨 위에 앉아 있던 콩새는 자신을 들킨 것이 부끄러워
꼭 콩새만한 가슴을 두근거리는 가을이었다
<현대시> 2008년 4월호 발표
제8회 미당문학상 수상작

가을 - 양주동(1903-1977) 개성.
가 없는 빈들에 사람을 보내고
말없이 돌아서 한숨 지우는
젊으나 젊은 아낙네와 같이
가을은 애처러이 돌아옵니다
애타는 가슴을 풀 곳이 없어
옛뜰의 나무들 더위잡고서
차디찬 달 아래 목놓아 울 때에
나뭇잎은 누런 옷 입고 조상합니다
드높은 하늘에 구름은 개어
간 님의 해맑은 눈자위 같으나
수확이 끝난 거칠은 들에는
옛님의 자취 아득도 합니다
머나먼 생각에 꿈 못 이루는
밤은 깊어서 밤은 깊어서
창 밑에 귀뚜라미 섧이 웁니다
가을의 아낙네여, 외로운 이여
<조선의 맥박>. 문예 공론사. 1932년

가을 - 유안진
이제는 사랑도 추억이 되어라
꽃내음보다는 마른 풀이 향기롭고
함께 걷던 길도 홀로 걷고 싶어라
침묵으로 말하며
눈 감은 채 고즈너기 그려보고 싶어라
어둠이 땅 속까지 적시기를 기다려
비로소 등불 하나 켜놓고 싶어라
서 있는 이들은 앉아야 할 때
앉아서 두 손 안에 얼굴 묻고 싶은 때
두 귀만 동굴처럼 길게 열리거라

가을 - 윤희상
일하는 사무실의 창 밖으로
날마다 모과나무를 본다
날마다 보는 모과나무이지만
날마다 같은 모과나무가 아니다
모과 열매는 관리인이 따다가
주인집으로 가져가고
모과나무 밑으로 낙엽이 진다
나의 눈이
떨어지는 낙엽을 밟고
하늘로 올라간다
낙엽이 계단이다

가을 - 이안
병든 나뭇잎 먼저
더 많은 벌레를 먹인 나뭇잎 먼저
아픔이 먼저
아픔에게 문병 간다

가을 - 정호승
돌아보지 마라
누구든 돌아보는 얼굴은 슬프다
돌아보지 마라
지리산 능선들이 손수건을 꺼내 운다
인생의 거지들이 지리산에 기대앉아
잠시 가을이 되고 있을 뿐
돌아보지 마라
아직 지리산이 된 사람은 없다

가을 - 조병화
가을은 하늘에 우물을 판다
파란 물로
그리운 사람의 눈을 적시기 위하여
깊고 깊은 하늘의 우물
그곳에
어린 시절의 고향이 돈다
그립다는 거, 그건 차라리
절실한 생존 같은거
가을은 구름 밭에 파란 우물을 판다
그리운 얼굴을 비치기 위하여

가을 - 조병화(1921-)경기도 안성
이제 일년내 맡고 계시던
그 눈을 돌려 주실 때가 되었습니다
당신 뜻대로 가을은 이루어져갑니다
당신 뜻대로 이루어지는 가을을
하나, 하나, 주워 모으기 위하여 떠나려는 내게
이제, 일년내 맡고 계시던
그 눈을 돌려 주실 때가 되었습니다
실로 많은 것들이 끝을 지어갑니다
대지에선 동식물들이 그 번식을 끝냈습니다
그리고 당신 뜻대로 그 열매들이 남아갑니다
하늘에선 태양과 구름이 그 가뭄과 홍수를 거둬 들였습니다
그리고 당신 뜻대로 다시, 빈 천지가 마련되어 갑니다
사람에선 사랑과 미움이 그 스스로의 맺음을 맺었습니다
그리고 당신 뜻대로 고독한 혼자들이 남아갑니다
그 열매들을 당신 뜻대로 주워 모르기 위하여
떠나려는 내게
맡으신 그 눈을 이제 돌려주실 때가 되었습니다
그 가득찬 빈 천지에 새 봄을 마련하기 위하여
떠나려는 내게
맡으신 그 눈을 이제 돌려 주실 때가 되었습니다
그 고독한 혼자들에게 당신의 뜻을 전하기 위하여
떠나려는 내게
맡으신 그 눈을 이제 돌려 주실 때가 되었습니다
맑게 닦아내 주십시오
흐린 점 하나 없이 맑게 닦아내 주십시오
당신의 입김으로
티 하나 없이 맑게 닦아 내 주십시오
도시에선 되도록이면 담가로
돌아다니겠습니다
전원에선 물가로 둑으로 산록으로
되도록이면 잡목림 잡초 속으로
돌아다니겠습니다
밤에는 별에서 쉬겠습니다
되도록이면 새로운 별을 찾아
좀 떨어진 곳에서 쉬겠습니다
그리고 혼자서 돌아오겠습니다
빈 손으로 돌아오겠습니다
모든 거 다, 당신 뜻대로 살펴 제자리 가려두고
지닌 거 하나 없이 혼자서 돌아오겠습니다
수고는
봄으로 해 주십시오
눈을 다시 돌려 드릴 때
수고의 말씀
봄에 받겠습니다
<내일 어느 자리에서> 춘조사.

가을 - 최승자
세월만 가라, 가라 그랬죠
그런데 세월이 내게로 왔습니다
내 문간에 낙엽 한 잎 떨어뜨립디다
가을입디다
그리고 일진광풍처럼 몰아칩디다
오래 사모했던
그대 이름
오늘 내 문간에 기어이 휘몰아칩디다

가을 - 함민복
당신 생각을 켜놓은 채 잠이 들었습니다

가을 - 헤세
덤불 속에는 너희 새들
너희의 노래 얼마나 퍼덕이는지
누렇게 물드는 숲을 따라 ㅡ
너희 새들아, 서둘러라!
곧 온다 부는 바람이
곧 온다 베는 죽음이
곧 온다 무서운 유령이 그리고 웃는다
우리 가슴이 얼어붙도록
정원이 그 모든 호화로움을
또 삶이 그 모든 광채를 잃어버리도록
이파리 속의 새들아
작은 형제들아
우리는 노래하자 즐겁자꾸나
머니않아 우리 먼지이다

가을 - 흄
가을밤의 싸늘한 감촉
밖으로 나왔더니
얼굴이 붉은 농부처럼
불그레한 달이 울타리 너머로 보고 있었다
나는 말은 건네지 않고 고개만 끄덕였다
가장자리에는 생각에 잠긴 별들이
도시의 아이들처럼 창백했다
Thomas Hulme(1883-1917) 영국

가을날 - 노천명
겹옷 사이로 스며드는 바람은
산산한 기운을 머금고...
드높아진 하늘에 비로 쓴 듯이 깨끗한
맑고도 고요한 아침 ...
여기저기 흩어져 촉촉히 젖은
낙엽을 소리없이 밟으며
허리때 같은 길을 내놓고
풀밭에 누어 거닐어보다
끊일락 다시 이어지는 벌레 소리
애연히 넘어가는 마디마디엔
제철의 아픔이 깃들였다
곱게 물든 단풍 한 잎 따들고
이슬에 젖은 치마자락 휩싸여쥐며 돌아서니
머언 데 기차 소리가 맑다

가을날 - 릴케(1875-1926)
주여 때가 왔습니다
지난 여름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
당신의 그림자를 해시계 위에 얹으시고
들녘엔 바람을 풀어 놓아 주소서
마지막 과일들이 무르익도록 명하소서
이틀만 더 남국의 날을 베푸시어
과일들의 완성을 재촉하시고
독한 포도주에는 마지막 단맛이 스미게 하소서
지금 집이 없는 사람은 이제 집을 짓지 않습니다
지금 혼자인 사람은 그렇게 오래 남아
깨어서 책을 읽고 긴 편지를 쓸 것이며
낙엽이 흩날리는 날에는 가로수들 사이로
이리저리 불안스레 헤매일 것입니다

가을날 - 서거정(1420-1488)
띳집은 대숲 길로 이어져 있고
가을 햇살 말고 곱게 빛나네
열매가 익어서 가지는 늘어지고
마지막 남은 덩굴에는 오이도 드무네
여전히 벌은 날개짓 그치지 않고
한가한 오리는 서로 기대어 졸고 있네
참으로 몸과 마음 고요하구나
물러나 살자던 꿈 이루어졌네

가을날 - 손동연
코스모스가
빨간 양산을 편 채
들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얘
심심하지?
들길이
빨간 양산을 받으며
함께 걸어가주고 있었다

가을날 - 정희성
길가의 코스모스를 보고
가슴이 철렁했다
나에게 남은 날이
많지 않다
선득하니, 바람에 흔들리는
코스모스 그림자가 한층 길어졌다

가을날 - 황인숙
"난 몰라, 이게 뭐에요!"
눈을 꼭 감고, 울려는 듯 비죽거리는
입을 뾰로통히 꼭 다물고
앞뒤 양다리를 뻣뻣이 모으고
옆으로 누워 있었다
새벽이면 쓰레기봉투들이 수거되는 곳 근처에서
우두커니 내려다보았던 어린 고양이
어디를 찾아봐도 보이지 않음으로
여름이 가버린 걸 알 수 있듯
아, 그렇게
죽음이 시체를 남기지 않았으면 좋겠다
애도 속에서 질겨지는 시체들을

가을에 - 기형도
잎 진 가지에
이제는 무엇이 매달려 있나
밤이면 유령처럼
벌레 소리여
네가 내 슬픔을 대신 울어줄까
내 음성을 만들어 줄까
잠들지 못해 여윈 이 가슴엔
밤새 네 울음 소리에 할퀴운 자국
홀로 된 아픔을 아는가
우수수 떨어지는 노을에도 소스라쳐
멍든 가슴에서 주르르르
네 소리
잎 진 빈 가지에
내가 매달려 물어볼까
찬바람에 떨어지고
땅에 부딪혀 부서질지라도
내가 죽으면
내 이름을 위하여 빈 가지가 흔들리면
네 울음에 섞이어 긴 밤을 잠들 수 있을까

베네치아 가면
가을에 - 김정환
우리가 고향의 목마른 황토길을 그리워하듯이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것은
그대가 내게 오래오래 간직해준
그대의 어떤 순결스러움 때문 아니라
다만 그대 삶의 전체를 이루는 아주 작은 그대의 몸짓 때문일 뿐
이제 초라히 부서져내리는 늦가을 뜨락에서
나무들의 헐벗은 자세와 낙엽 구르는 소리와
내 앞에서 다시 한번 세계가 사라져가는 모습을
내가 버리지 못하듯이
내 또한 그대를 사랑하는 것은
그대가 하찮게 여겼던 그대의 먼지, 상처, 그리고 그대의
생활 때문일 뿐
그대의 절망과 그대의 피와
어느날 갑자기 그대의 머리카락은 하옇게 세어져버리고
그대가 세상에게 빼앗긴 것이 또 그만큼 많음을
알아차린다 해도
그대는 내 앞에서 행여
몸둘 바 몰라하지 말라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것은
그대의 치유될 수 없는 어떤 생애 때문일 뿐
그대의 진귀함 때문은 아닐지니
우리가 다만 업수임받고 갈가리 찢겨진
우리의 조국을 사랑하듯이
조국의 사지를 사랑하듯이
내가 그대의 몸 한 부분, 사랑받을 수 없는 곳까지
사랑하는 것은

가을에 - 서정주
오게
아직도 오히려 사랑할 줄 아는 이
쫓겨나는 마당귀마다 푸르고도 여린
문들이 열릴 때는 지금일세
오게
저속에 항거하기에 여울지는 자네
그 소슬한 시름의 주름살들 그대로 데리고
기러기 앞서서 떠나가야 할
섧게도 빛나는 외로운 안해으 이마와 가스으로 걸어야 하는
가을 안행이 비롯해야 할 때는 지금일세
작년에 피었던 우리 마지막 꽃 ㅡ 국화꽃이 있던 자리
올해 또 새격이 자넬 달래 일어나려고
백로는 상강으로 우릴 내리 모네
오게
지금은 가다듬어진 구름
헤매고 뒹굴다가 가다듬어진 구름은
이제는 양귀비의 피비린내 나는 사연으로는 우릴 가로막지 않고
휘영청한 개벽은 또 한번 뒷문으로부터
우릴 다지려
아침마다 그 서리 묻은 얼굴들을 추켜들 때일세
오게
아직도 오히려 사랑할 줄 아는 이
쫓겨나는 마당귀마다, 푸르고도 여린
문들이 열릴 때는 지금일세

영동 영국사
가을에 - 오세영
너와 나
가까이 있는 까닭에
우리는 봄이라 한다
서로 마주하며 바라보는 눈빛
꽃과 꽃이 그러하듯 ...
너와 나
함께 있는 까닭에
우리는 여름이라 한다
붑뎌대는 살과 살 그리고 입술
무성한 잎들이 그러하듯 ...
아, 그러나 시방 우리는
각각 홀로 있다
홀로 있다는 것은
멀리서 혼자 바라만 본다는 것
허공을 지키는 빈 가지처럼
가을은
멀리 있는 것이 아름다운
계절이다

가을에 - 정한모
맑은 햇빛으로 반짝반짝 물들으며
가볍게 가을을 날으고 있는
나뭇잎
그렇게 주고받는
우리들의 반짝이는 미소로도
이 커다란 세계를
넉넉히 떠받쳐 나갈 수 있다는 것을
믿게 해 주십시오
흔들리는 종소리의 동그라미 속에서
엄마의 치마 곁에 무릎을 꿇고
모아 쥔 아가의
작은 손아귀 안에
당신을 찾게 해 주십시오
이렇게 살아가는
우리의 어제 오늘이
마침낸 전설 속에 묻혀 버리는
해저 같은 그늘은 있을 수 없습니다
달에는
은도끼로 찍어낼
계수나무가 박혀 있다는
할머니의 말씀이
영원히 아름다운 진리임을
오늘도 믿으며 살고 싶습니다
어렸을 적에
불같이 끓던 병석에서
한없이 밑으로만 떨어져 가던
그토록 아득하던 추락과
그 속력으로
몇 번이고 까무러쳤던
그런 공포의 기억이 진리라는
이 무서운 진리로부터
우리들의 이 소중한 꿈을
꼭 안아 지키게 해 주십시오

가을에 - 황동규
가을엔 이별의 앞차를 타리
길 뚫려 미리 터미널에 나가
시간 채 안 찬 차 타듯
길 양편에서 손짓하는 억새들을 지나
그 뒤를 멋대로 색칠한 단풍들을 지나
낯익은 도시의 바뀐 모습에 한눈 팔다가
광장 한구석 조그많고 환한 과일 좌판 위에
낙엽 한 장으로. 혈맥 한 장으로
내리듯
과일에 닿기 직전
바람을 놓치고 한번 맴돌며
왜 이곳에 왔나를 환히 잊듯
그렇게 살다 가리
떠남의 한 모습

창덕궁 만월문
늦가을 - 김사인
그여자 고달픈 사랑이 아파 나는 우네
불혹을 넘어
손마디는 굵어지고
근심에 지쳐 얼굴도 무너졌네
사랑은
늦가을 스산한 어스름으로
밤나무 밑에 숨어 기다리는 것
술 취한 무리에 섞여 언제나
사내는 비틀비틀 지나가는 것
젖어드는 오한 다잡아 안고
그 걸음 저만치 좇아 주춤주춤
흰고무신 옮겨보는 것
적막처닞
한밤중에 깨어 앉아
그 여자 머리를 감네
올 사람도 갈 사람도 없는 흐린 불 아래
제 손만 가만가만 만져보네
<가만히 좋아하는> 창비.

운명의 실을 감고 푸는 모이라이 자매
늦가을 - 김지하
늦가을 잎새 떠난 뒤
아무 것도 남김 없고
내 마음 빈 하늘에
천둥소리만 은은하다

늦가을 - 이덕무(1741-1793)
작은 서재에 찾아온 가을날이 너무도 맑아
손으로 갈포 두건 바로잡고 물소리를듣네
책상에 시편 있고 울타리엔 국화 피었으니
사람들은 이 그윽한 멋을 도연명같다 말하네
약관의 나이에 박제가. 유득공. 이서구와함께 <건연집>이라는 시집을 냈다
서자 출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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