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 / 권정생
보리짚 깔고 보리짚 덮고
보리처럼 잠을 잔다.
눈 꼭 감고 귀 오구리고 코로 숨쉬고
엄마 꿈 꾼다 아버지 꿈 꾼다.
커다란 몸뚱이 굵다란 네다리.
아버지 내 어깨가 이만치 튼튼해요
가슴 쫙펴고 자랑 하고 싶은데
그 아버지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소는 보리 짚 속에서 잠이깨면
눈물이 쪼르르 흐른다.
정축년 어느 날 일기 / 권정생
그 집엔
십 년이 넘은 늙은 개 한 마리와
늙은 인간 하나가 살고 있었다.
늙은 개는 늙은 인간의
일거수 일투족을 지켜보는
감시자가 되어 있었다.
늙은 인간은 오래 전부터
어디가 탈이 나서 그런지
자주 몸에 열이 나서 눕는 날이 많다.
늙은 개가 쯧쯧 혀를 차면서
이 인간아
전생에 무슨 못할 짓을 했기에
날이면 날마다 아파쌌는거야?
자존심 상한 늙은 인간이
벌떡 일어나 앉았다.
어디 아파서 열이 나는줄 아냐?
이 똥개야!
이래 봬도
평생 정의에 불타는 가슴으로 살다보니 그런 거다!
늙은 개가 또 혀를 차면서
저 인간이 이젠 머리까지 돌았군
한다.
인간성에 대한 반성문 (2) / 권정생
도모꼬는 아홉 살
나는 여덟 살
이학년인 도모꼬가
일학년인 나한테
숙제를 해달라고 자주 찾아왔다.
어느 날, 윗집 할머니가 웃으시면서
도모꼬는 나중에 정생이한테
시집가면 되겠네
했다.
앞집 옆집 이웃 아주머니들이 모두 쳐다보는 데서
도모꼬가 말했다.
정생이는 얼굴이 못생겨 싫어요!
오십 년이 지난 지금도
도모꼬 생각만 나면
이가 갈린다.
밭 한 뙈기 / 권정생
사람들은 참 아무것도 모른다.
밭 한 뙈기 논 한 뙈기
그걸 모두 '내'거라고 말한다.
이 세상 온 우주 모든 것이
한 사람의 '내'것은 없다.
하나님도 ‘내'거라고 하지 않으신다.
이 세상 모든 것은 모두의 것이다.
아기 종달새의 것도 되고 아기 까마귀의 것도 되고
다람쥐의 것도 되고 한 마리 메뚜기의 것도 된다.
밭 한 뙈기 돌멩이 하나라도
그건 내 것이 아니라 온 세상 모두의 것이다.
한 인간과 하늘이 동시에 울부짖었다 / 권정생
ㅡ인간
70년을 살았지만
아직 양복도 못 입어보고
넥타이도 못 매보고
장가도 못 가보고
약혼도 한번 못해봤습니다
돈까스도 못 먹어보고
피자도 못 먹어봤습니다
억울합니다!
억울합니다!
ㅡ하늘
겨우 70년 살아보고 그러냐
나는 7백억 년을 살았지만
아직 장가도 못 가보고
돈까스도 못 먹어보고
피자는커녕
미숫가루도 못 먹어봤다
이 꼰대기 같은 놈아!
기도 / 권정생
기도하는 가을입니다
하느님
이 가을
춘산 장로님
건강 속히 회복되게
도와주십시오
그리고
봉화에 감나무 시어머니 같은
사람 하나 살고 있는데
그 집 매실도 내년에는
많이 열게 해주십시오
대신
잔소리 좀 안하게 해주시길
두 손 모아 빌고 또 빕니다
아멘
권정생 선생님이 남기신 말씀들
“나는 죽어서 가는 천당, 생각하고 싶지 않다.
사는 동안만이라도 서로 따뜻하게 사랑하며 살아가야 하지 않겠는가?”
“내가 만약 교회를 세운다면, 뾰족탑에 십자가도 없애고 우리 정서에 맞는 오두막 같은 집을 짓겠다.
물론 집안 넓이는 사람이 쉰명에서 백명쯤 앉을 수 있는 크기는 되어야겠지. 정면에 보이는 강단 같은 거추장스런 것도 없이 그냥 맨마루바닥이면 되고, 여럿이 둘러앉아 세상살이 얘기를 나누는 예배면 된다.
ㅇㅇ교회라는 간판도 안 붙이고 꼭 무슨 이름이 필요하다면 '까치네 집'이라든가 '심청이네 집'이라든가
'망이네 집' 같은 걸로 하면 되겠지. 함께 모여 세상살이 얘기도 하고, 성경책 얘기도 하고, 가끔씩은 가까운 절간의 스님을 모셔다가 부처님 말씀도 듣고, 점쟁이 할머니도 모셔와서 궁금한 것도 물어보고, 마을 서당 훈장님 같은 분께 공자님 맹자님 말씀도 듣고, 단옷날이나 풋굿 같은 날엔 돼지도 잡고 막걸리도 담그고 해서 함께 춤추고 놀기도 하고, 그래서 어려운 일, 궃은 일도 서로 도와가며 사는 그런 교회를 갖고 싶다.”
“한국의 모든 교회는 이런 것을 새롭게 배워야 한다. 서구인들이 마음대로 변질시켜 놓은 예수의 참된 복음을 깨닫는다면, 창조 이래 이 땅에서 역사하신 하느님의 숨결을 금방 찾아낼 것이다. 나는 지금 20여 년 전에 내가 구상하고 꿈꿨던 교회는 벌써 전에 잊었다. 교회는 새삼스레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온 세계와 온 우주가 바로 하느님의 교회이기 때문이다. 그 속에서 나는 떳떳하게 모든 자연과 더불어 사람이나 동물이나 서로
섬기며 살고 싶을 뿐이다. 하느님은 그것을 원하셨기에 이 땅에 예수님을 보내주셨다.
서로 섬기는 삶이야말로 예수님이 가르쳐준 사랑이며 그것을 위해 피 흘려 희생하신 것이다. 이 땅위의 진짜 우상과 마귀는 제국주의와 전쟁과 핵무기와 분단과 독재와 폭력이다.”
“예수님은 줄 만큼 준다고 했는데 요즘 교회는 너무 많이 갖고 있는 게 탈”
“교회나 절이 없었더라도 더 나빠지지는 않았을 것 같다”
권정생의 유언
내가 죽은 뒤에 다음 세 사람에게 부탁하노라.
1. 최완택 목사 민들레교회
이 사람은 술을 마시고 돼지 죽통에 오줌을 눈 적은 있지만 심성이 착한 사람이다.
2. 정호경 신부
이 사람은 잔소리가 심하지만 신부이고 정직하기 때문에 믿을 만하다.
3. 박연철 변호사
이 사람은 민주변호사로 알려졌지만 어려운 사람과 함께 살려고 애쓰는 보통 사람이다.
우리 집에도 두세 번쯤 다녀갔다. 나는 대접 한 번 못했다.
위 세 사람은 내가 쓴 모든 저작물을 함께 잘 관리해주기를 바란다. 내가 쓴 모든 책은 주로 어린이들이 사서 읽는 것이니 여기서 나오는 인세를 어린이에게 되돌려주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만약에 관리하기 귀찮으면 한겨레신문사에서 하고 있는 '남북어린이 어깨동무'에 맡기면 된다. 맡겨 놓고 뒤에서 보살피면 될 것이다.
유언장이란 것은 아주 훌륭한 사람만 쓰는 줄 알았는데 나 같은 사람도 이렇게 유언을 한다는 게 쑥스럽다.
앞으로 언제 죽을지는 모르지만 좀 낭만적으로 죽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나도 전에 우리 집 개가 죽었을 때처럼 헐떡헐떡거리다가 숨이 꼴깍 넘어가겠지. 눈은 감은 듯 뜬 듯하고 입은 멍청하게 반쯤 벌리고 바보같이 죽을 것이다. 요즘 와서 화를 잘 내는 걸 보니 천사처럼 죽는 것은 글렀다고 본다. 그러니 숨이 지는 대로 화장을 해서 여기저기 뿌려주기 바란다.
유언장치고는 형식도 제대로 못 갖추고 횡설수설했지만 이건 나 권정생이 쓴 것이 분명하다. 죽으면 아픈 것도 슬픈 것도 외로운 것도 끝이다. 웃는 것도 화내는 것도, 그러니 용감하게 죽겠다.
만약에 죽은 뒤 다시 환생을 할 수 있다면 건강한 남자로 태어나고 싶다. 태어나서 25살 때 22살이나 23살쯤 되는 아가씨와 연애를 하고 싶다. 벌벌 떨지 않고 잘할 것이다. 하지만 다시 환생했을 때도 얼간이 같은 폭군 지도자가 있을 테고 여전히 전쟁을 할 지 모른다. 그렇다면 환생은 생각해봐서 그만둘 수도 있다.
2005년 5월 1일 쓴 사람 권정생

권정생 선생은 '내 죽을 때 300만원만 있으면 된다' 고 입버릇처럼 말했다고 전해진다.
그 돈으로 화장해 집 근처에 뿌리고 집도 없애 자연상태로 돌리고 기념관도 절대 짓지 말라고.....
모든 상을 거절한 것으로 유명했는데 1995년 아동문학가 윤석중 선생이 당신의 의사를 묻지 않고
새싹문학상 수상자로 선정, 오두막으로 직접 상패와 상금을 가져오자
다음날 우편으로 돌려보냈다는 일화가 있다.
'♧ 문학의 향기 > ♣ 영상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우리 보고 싶으면 만나자 - 용혜원 (0) | 2011.02.11 |
|---|---|
| 황홀한 거짓말 / 유안진 (0) | 2011.02.10 |
| 부석사 무량수전 앞에서 / 정일근 (0) | 2011.02.09 |
| 어머니 사시는 그 나라에는 / 권정생 (0) | 2011.02.09 |
| 사랑이 그대를 부르거든 / 칼릴 지브란 (0) | 2011.02.09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