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기 택(시인)
왜 시를 쓰느냐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나는 한 마디로 시 쓰는 일이 즐거웠기 때문이라고 대답한다. 나는 시를 통해서 어떤 가치 있는 진리를 발견할 생각도 없고, 어떤 특별한 아름다움을 창조할 생각도 없으며, 우리 시의 발전을 위해서 뭔가 기여해야 한다는 생각도 별로 해 본 일이 없다. 처음 시 습작을 시작했을 때 나는 시가 무엇인지 거의 몰랐고, 지금도 잘 안다고 할 수 없다. 그러나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언제나 시 쓰는 일이 즐거웠다는 사실이다. 시 안에서는 고통도 즐거웠고, 슬픔도 즐거웠고, 심지어 누구에게도 차마 드러낼 수 없는 내 삶의 치욕조차도 즐거웠다. 시 안에는 삶을 압박하는 모든 것들을 이상한 기쁨으로 바꾸는 마술적인 장치가 있음이 분명하다. 시를 쓰면서 괴롭거나 답답했던 것은 시가 잘 써지지 않을 때, 그래서 영영 시 못 쓰는 불구가 되지 않을까 걱정될 때뿐이었다. 그러나 그런 괴로움은 시를 쓰는 순간 날아가 버리곤 했다.
물론 시가 삶의 조건을 바꾸어 주는 것은 아니다. 그렇기는커녕 오히려 삶을 더 곤란하게 할 때가 많을지도 모른다. 또한 시를 쓴다고 해서 현실의 괴로움이나 불안 따위가 조금이라도 줄어드는 것도 아니다. 시를 쓴다고 해서 종교적인 구원과도 같은 안식과 평화가 내 속에서 충만해지는 것도 아니다. 시 쓰기의 즐거움은 순간이다. 그러나 그 순간은 단순히 ‘짧은 시간’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무시간적인 시간이며, 순간 속에 수십 년이 체험되는 것 같이 길고 짧음을 초월한 시간이며, 영원을 체험적으로 맛볼 수 있는 시간이기도 하다. 그래서 내면에 지속적인 영향을 주는 힘을 갖고 있다. 시를 안 쓰는 긴 시간은 시가 나오기를 기다리는 즐거움이며, 시를 쓰는 짧은 시간은 그 희열을 순간적으로 체험하는 즐거움이다. 그것은 첫사랑의 시간처럼 늘 지금 막 처음 경험하는 숨 막히는 울렁임이며, 기억하고 반추할 때마다 새것처럼 재생되는 떨림이다.
이제 내 시 쓰기를 돌아보며, 시 쓰기가 나에게 준 즐거움을 되새겨보고자 한다.
1. 습작기
고등학교를 졸업했지만 대학 진학을 할 수 없어 아무런 희망도 없던 스무 살 무렵, 나는 안양에서 등사판으로 동인지를 만들며 시를 쓰는 친구들을 따라 시를 써보게 되었다. 고등학교 다닐 때까지 내 유일한 희망은 그림을 그리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공업고등학교에 다녀야 했다. 그래도 그 희망을 포기할 수 없었다. 마침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내 처지를 냉정하게 인식하게 되자 마침내 나는 그림을 포기했다. 그것은 내 삶의 반쪽이 떨어져 나가는 것 같은 큰 아픔이었다.
시 쓰기는 특별히 내가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종이와 연필만 있으면 아무 데서나 할 수 있는, 가난한 사람에게 무엇보다 친근하고 매력적인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때 나는 소심하고 겁 많고 폐쇄적인 성격이었고, 작고 깡마른 외모를 지녔으며, 내 몸뚱이 외에는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었고, 아무리 둘러봐도 기댈 만한 곳도 없는 처지였다. 나는 그런 치욕스러운 몸을 가지고 경제적으로 독립하여 살아야 했으며, 내 미래는 암담했다. 그런 나에게 다가온 시는 종이와 연필만 있으면 할 수 있는 것, 그것도 눈치 볼 것도 없이 나 혼자서 마음껏 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것은 무능한 나에게 아주 잘 어울리는 것이었다. 때마침 나의 내면에서는 꼭 나와야만 할 말들이 있었던 것 같다.
나의 첫 시는 내 속에 있는 말들을 배설하듯이 마구 꺼내는 것이었다. 내키는 대로 직설적이고 생경한 말로 하고 싶은 말을 힘차게 꺼내는 것이었다. 시라고 하기엔 너무나 꼴불견이었으나 적어도 배설의 쾌감은 있었다. 그 쾌감에 이끌려 나는 시를 쓰는 재미에 조금씩 빠지기 시작했다. 그때 내가 생각한 시는 내면에 있는 것을 정직하고 힘차게 뽑아내는 것이었다.
구멍의 어둠 속에 정적의 숨죽임 뒤에
불안은 두근거리고 있다
사람이나 고양이의 잠을 깨울
가볍고 요란한 소리들은 깡통 속에
양동이 속에 대야 속에 항상 숨어 있다
어둠은 편안하고 안전하지만 굶주림이 있는 곳
몽둥이와 덫이 있는 대낮을 지나
번득이는 눈과 의심 많은 귀를 지나
주린 위장을 끌어당기는 냄새를 향하여
걸음은 공기를 밟듯 나아간다
꾸역꾸역 굶주림 속으로 들어오는 비누 조각
비닐 봉지 향기로운 쥐약이 붙어 있는 밥알들
거품을 물고 떨며 죽을 때까지 그칠 줄 모르는
아아 황홀하고 불안한 식욕
- 「쥐」 전문
「쥐」는 등단 후에 쓴 시이지만, 지금 돌이켜 보면 습작기의 내 모습과 너무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든다. 겁 많고 소심하고 어두운 곳에 혼자 있기 좋아하는 폐쇄적인 습성을 지니고 있지만, 먹고 살기 위해 밝은 대낮에 사람들이 많은 곳으로 가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 속에 있는 내 모습 말이다. 내가 포기했던 욕망과 내 처지 사이의 커다란 결핍이 아마도 시 속에서는 내 에너지가 되었을 것이다. 나는 시 속에서 마음껏 소리를 질렀고, 등사판으로 프린트한 시는 그것을 다 받아주었다. 생각해 보면, 시를 잘 못써도 시만 생각하면 숨 막히도록 즐거웠던 초기 습작시절이 내게는 가장 즐거운 시 쓰기였던 것 같다.
2. 불구성의 유희 또는 허구적 상상력의 놀이
습작을 한 지 10년 정도 지나서, 나는 갑자기 등단했다. ‘갑자기’라고 한 것은, 내가 등단할 것이라고 전혀 생각하지도 못했고, 한 번도 내가 투고한 신춘문예의 본심에서 거론되었던 적이 없던 터라 믿을 수 없었으며, 등단하려고 특별히 준비하거나 애를 쓰지도 않았으며, 시인이 될 어떤 준비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12월이 되자, 각 신문에 신춘문예 사고가 났기 때문에, 괜히 그걸 보면 마음이 들떴기 때문에, 안 보내면 섭섭하고 뭔가 손해 보는 것 같았기 때문에 투고를 했던 것인데, 투고하고는 곧 잊어버렸던 것인데, 머리를 한 대 세게 얻어맞은 것 같이 당선 통지를 받은 것이다. 취직한 직장에서 잘리지 않고 근근이 버티려고 애를 쓰던 무렵이었다. 그때 나는 변변치 못한 습작일지라도 시를 쓰고 있었다는 사실을 상기했고, 화들짝 놀랐다. 이제부터는 많은 사람들이 내 작품을 눈여겨 볼 거라 생각하니 소름이 돋았고, 정신 차리고 시를 써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하도
그 낮게 구부러진 어둠에 눌려
그 노인은 언제나 보이지 않았다.
출근길
매일 그 자리 그 사람이지만
만나는 건 늘
빈 손바닥 하나, 동전 몇 개뿐이었다.
가끔 등뼈 아래 숨어사는 작은 얼굴 하나
시멘트를 응고시키는 힘이 누르고 있는 흰 얼굴 하나
그것마저도 안 보이는 날이 더 많았다.
하루는 무덥고 시끄러운 정오의 길바닥에서
그 노인이 조용히 잠든 것을 보았다.
등에 커다란 알을 하나 품고
그 알 속으로 들어가
태아처럼 웅크리고 자고 있었다.
곧 껍질을 깨고 무엇이 나올 것 같아
철근 같은 등뼈가 부서지도록 기지개를 하면서
그것이 곧 일어날 것 같아
그 알이 유난히 크고 위태로워 보였다.
거대한 도시의 소음보다 더 우렁찬
숨소리 나직하게 들려오고
웅크려 알을 품고 있는 어둠 위로
종일 빛이 내리고 있었다.
다음날부터 노인은 보이지 않았다.
- 「꼽추」 전문
등단작 「꼽추」는 ‘쥐’와 같은 처지에 있던 내 불구적인 내면 풍경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의 내 내면 풍경이 어땠는지는 이제 잘 생각나지는 않지만, ‘꼽추’를 보면 어느 정도 떠올릴 수 있을 것 같다. 이 시에서 꼽추는 불구인 데다가 노인이며 걸인이다. 생의 가장 낮은 밑바닥과 더 이상 디딜 곳 없는 마지막에 서 있는 처지다. 지하철 입구에서 구걸을 하지만, 사람으로 보이지 않아 눈에 띄지 않는 존재이다. 이 시에서 나는 사방팔방 출구가 막혀 도망갈 곳 없는 이 불구의 거지 노인을 더 가혹하고 잔인하게 구석으로 몰아붙였다. 죽음 밖에는 아무런 희망이 없는 이 거지에게 마지막으로 극한의 치욕을 부여하였다. 치욕이 부글부글 끓어 터지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상황으로 몰아갔다. 그것은 바로 나 자신의 내면적인 불구에 대한 증오였다. 이 불구를 가지고는 단 한 순간도 편히 숨을 쉴 수 없는 상황에 대한 단호한 시적 처방이었다. 다행히 10년 습작을 하면서 나는 시 속에서 무조건 소리만 지르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는 것을 터득했던 모양이다. 터지기 않으면 안 될 극한 상황에서 ‘알’의 이미지가 나왔고, 신생의 숨소리가 도시의 거대한 소음을 뚫고 들려왔으니 말이다. 나는 연약한 나의 삶을 억누르는 모든 폐쇄적이고 억압적 상황을 꼽추 노인 속에다 다 몰아놓고, 일생을 억눌려온 등뼈가 최대치로 끓어올라 끝내는 흉한 불구의 등을 터뜨리고 나오는 상상의 놀이를 한 것이다. 그리고 그 흉측한 불구의 알이 터져 신생아가 나오는, 즉 불구가 새 생명으로 바뀌는 불구성의 유희를 즐긴 것이다.
현실은 꼽추 노인의 일생을 눌러온 등뼈의 압박처럼 아무리 부조리한 것이라도 삶으로 그것을 감당해내지 않으면 안 된다. 어떠한 삶이 주어지더라도 그것은 살아내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다. 그 현실은 삶을 장악하고, 때로는 삶이 감당하기 힘든 폭력을 행사하고 수치심을 유발한다. 이 현실이 부당하다고 소리치면 소리칠수록 현실은 더욱 삶을 바짝 조인다. 개인이 아무리 바꾸려고 해도 이 현실은 거의 바뀌지 않는다. 조금씩 상황을 개선시킬 수는 있지만, 그 근본적인 조건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개인이 바꾸기에는 그것은 너무 크고 단단하고, 그것을 상대해야 하는 삶은 연약하다. 그래서 변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압박하기만 하는 현실은 늘 개인을 답답하고 괴롭게 한다.
시는, 또는 예술은, 바위처럼 단단하고 변하지 않는 이 고집 센 삶의 조건을 밀가루 반죽처럼 물렁물렁하고 쉽게 형태가 바뀌는 조건으로 만드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현실의 삶은 변하지 않지만 허구적 상상력을 통해서 현실과는 다른 삶을 체험할 수 있다. 「꼽추」에서 죽음 이외에는 모든 길이 막힌 꼽추 노인이 수치와 고통의 극점에서 막 태어나는 알을 품듯이, 시는 허구적 상상력을 통해서 삶을 밀가루 반죽처럼 무엇이든 변화될 수 있는 재료로 바꾸는 놀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때 체험하는 삶의 변화는 현실의 변화는 아니다. 좌절된 욕망이 현실에서 충족되는 것은 아니다. 즉 그것은 욕망의 가짜 충족이다. 그러나 이것은 시라는 가상현실 속에서 현실과는 다른 삶을 체험하게 한다. 이때 현실은 제한된 시공간을 넘어 무한히 확장될 수 있다. 그때 숨이 막히는 현실에는 숨통이 생기고 현실에 구속된 삶은 광활한 자유를 체험하게 된다.
3. 동물시 또는 몸의 언어
등단 초기에는 이상하게 동물시가 많이 씌어졌다. 나는 동물에 특별히 관심을 갖지도 않았고 동물을 길러보았거나 공부해 본 적도 없었다. 그런데 왜 그 시기에 동물시를 썼는지 잘 모르겠다. 여하튼 그때 갑자기 쏟아져 부지런히 받아 적었던 동물시들이 첫 시집의 앞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생각건대 동물시는 아마도 나 자신에 대한 관찰의 연장이었을 것이다. 외부와 환경의 폭력을 견뎌낸 몸들과 거기서 생긴 상처와 두려움이 육체화된 현장을 관찰할 때, 내 시는 매우 공격적이 되고 집요해진다. 구경거리나 음식물이 되는 동물에 대해 필요 이상으로 가학적이 되기도 한다. 그것은 대상에 대한 관찰이 아니라 대상을 바라보는 나를 관찰하기 때문일 것이다.
동물시들 속에 나오는 몇몇 동물들은 환경의 폭력을 견디느라 몸의 특정 기능이 지나치게 발달해 있다. 한때는 생명을 유지하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했을 기능이 오늘의 상황에서는 쓸모없는 우스꽝스러운 모습이 되어 있다. 그것들은 오랜 세월 동안 폭력을 견딘 상처가 육체화된 것이며, 그 폭력과 역사는 아직도 육체 속에 살아남아 그 육체와 함께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단지 구경거리이거나 음식일 뿐이다.
나는 누구인가? 내 몸이란 무엇인가? 인간과 동식물을 막론하고 모든 살아 있는 생물체의 몸에는 그 몸을 있게 한 선조들의 몸과 그들의 생활과 그들이 살면서 겪었던 고통과 즐거움의 흔적이 있다. 모든 몸에는 현재의 살아 있는 몸뿐 아니라 그 몸이 나기 전까지 태어남과 죽음으로 연쇄적으로 이어진 모든 선조들의 몸이 집적되어 있는 것이다. 나의 몸은 수많은 선조들의 살아 있는 유적이다. 때때로 나는 나의 몸에서 그런 수많은 타자들이 살아 있음을 느낀다. 그때 그들은 살아 있는 내 몸에 살아 있는 타자로서 참여하면서 자신의 권리를 행사하려 한다. 즉 ‘나’라는 살아 있는 몸을 빌려 그동안 죽은 모든 선조들이 동거하고 있다. 그러므로 ‘나’라는 단수는 모든 선조들의 몸이 합쳐진 복수형 단수이다. 나의 말과 행동과 생각과 습관은 선조들의 역사의 결과이며, 나는 그 모든 이들의 말과 행동과 생각을 대신하고 있는 것이다. 맛있는 음식을 보고 침을 흘릴 때, 벗은 여자의 탐스러운 몸을 보고 나의 남성이 뻣뻣하게 설 때, 손톱으로 유리 긁는 소리에 온몸에 소름이 돋을 때, 내 몸의 반응은 나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일어나는 것이다. 내 의지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내 몸 속의 선조들이 수백 년 수천 년에 걸쳐 해왔던 그대로 자동적으로 움직이는 것이다. 내 안에 있는 선조들이 명령하고 행동하는 것에 단지 몸이 수동적으로 따를 뿐이다. 보이지 않는 몸속에는 복수이자 단수이며 죽은 자이자 산 자이고 타인이자 나인 이 모든 선조들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므로 모든 몸에는 현재의 몸이 있기까지의 역사가 생생하게 보존되어 있다. 내 몸은 지금까지 내 몸에 태어남과 죽음의 사슬로 연결된 모든 몸들의 살아있는 유물이다. 내 몸은 그 몸들에게 가해진 모든 환경적인 위협과 그로 인한 상처가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다. 나는 때때로 내 식욕과 성욕, 갑자기 생기는 공격본능, 두려움과 불안 등에서 그 상처들이 재생되는 것을 느낀다.
소의 커다란 눈은 무언가 말하고 있는 듯 한데
나에겐 알아들을 수 있는 귀가 없다.
소가 가진 말은 다 눈에 들어있는 것 같다.
말은 눈물처럼 떨어질 듯 그렁그렁 달려 있는데
몸밖으로 나오는 길은 어디에도 없다.
마음이 한 움큼씩 뽑혀 나오도록 울어보지만
말은 눈 속에서 꿈쩍도 하지 않는다.
수천만 년 말을 가두어 두고
그저 끔벅거리고만 있는
오, 저렇게도 순하고 동그란 감옥이여.
어찌해볼 도리가 없어서
소는 여러 번 씹었던 풀줄기를 배에서 꺼내어
다시 씹어 짓이기고 삼켰다간 또 꺼내어 짓이긴다.
- 「소」 전문
나는 그 기록들이 생생하게 저장된 몸을 관찰하는 것이 즐겁다. 사람들이나 동물들, 식물들의 어떤 사소한 움직임이나 표정에서 갑자기 솟아오르는 재미있는 힌트들을 낚아채어 언어에 담는 순간이 좋다. 그렇지만 나는 기껏해야 그것을 제3자의 입장에서 기록하는 기록자에 불과하다. 낫 놓고 기억자도 모르는 사람처럼, 나는 그 몸들을 앞에 두고도 그 몸이 말하는 비밀을 잘 알아들을 수가 없다. 소귀에 경을 읽어도 소가 알아들을 수 없듯이, ‘소’라는 몸-경전을 앞에 두고도 나는 그것을 읽을 수가 없다. 그러나 느낌은 있다. 그 느낌은 때로는 매우 생생하다. 그러나 그것을 언어에 담는 길은 ‘어디에도 없다’. 그러니까 내 시는 ‘소귀에 경 읽기’에서 그다지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알아듣지 못하는 답답함 때문에 ‘수천만 년 말을 가두어 두고 그저 끔벅거리고만’ 있을 뿐이다. 그러나 무언가 알 듯 말 듯한, 그러나 결코 알 수 없는 몸의 무궁, 그 답답한 숨막힘은 대단히 매력적이다.
-이 강의는 남산 문학의 집에서 '지난 5월 16일 열렸던 '시우주 시낭송회' 5월 특강입니다.
김기택 시인은 우리 지역에서 태어나 낙엽문학 동인을 거쳐,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당선하였습니다.
시인의 발자취는 글길문학 34집 '동인시대를 말하다'에 제가 일부 게재해 놓았으며,
당선시 '꼽추' 전문도 실려 있습니다.
이 글이 시를 쓰시는 모든 분들과 시를 사랑하시는 분들께
작은 도움이나마 되었으면 좋겠습니다.(김기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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